80년대 나이키와 아디다스, 스니커즈 시장 경쟁의 시작

80년대 나이키와 아디다스, 스니커즈 시장 경쟁의 시작

컨버스가 지배하던 시장

80년대 초반 농구화 시장은 컨버스가 55%의 점유율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나이키의 점유율은 15%에 불과했다. 아디다스 역시 탄탄한 입지를 갖추고 있어, 나이키 입장에서는 세 자리 경쟁에서 뒤처진 처지였다.

65달러짜리 도박

전환점은 1985년 4월 출시된 에어 조던 1이었다. 디자이너 피터 무어가 디자인한 이 신발은 65달러라는 가격표를 달고 나왔다. 나이키는 이 라인으로 3년간 300만 달러의 매출을 목표로 세웠는데, 실제로는 출시 첫 해에만 1억 2,6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며 목표를 압도적으로 뛰어넘었다.

금지된 신발이라는 마케팅

이 신발을 둘러싼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밴드(Banned)” 캠페인이다. 화려한 색상 배합이 NBA 유니폼 규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착용이 금지됐다는 서사를 광고에 활용한 것으로, 금지라는 단어 자체가 오히려 소비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설적인 마케팅으로 작용했다.

아디다스의 대응

아디다스는 뉴욕 닉스의 패트릭 유잉과 계약하며 맞대응에 나섰다. 마이클 조던과 나이키, 패트릭 유잉과 아디다스라는 구도는 이 시기 농구화 시장이 특정 스타 선수를 앞세운 경쟁으로 재편됐음을 보여준다.

스타 마케팅이라는 공식의 탄생

이전까지 스니커즈는 기능성 스포츠 용품에 가까웠다면, 80년대 중반 이후로는 특정 선수의 이름과 이미지를 앞세운 상품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 시기 확립된 공식은 이후 스니커즈 산업 전체가 스타 마케팅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출발점이 됐다.

조용히 앞서가고 있던 제3의 회사

같은 시기 농구화 경쟁의 그늘에서 전혀 다른 시장을 장악한 회사가 있었다. 리복이다. 1982년 출시된 여성용 신발 프리스타일은 에어로빅 열풍을 타고 폭발적으로 팔려나갔고, 1983년 리복 매출의 절반을 이 한 모델이 책임질 정도였다.

컨버스는 왜 뒤처졌을까

정작 시장을 오래 지배했던 컨버스는 왜 뒤처졌을까. 경쟁사들이 가죽 갑피와 더 단단한 밑창으로 전환하는 동안 컨버스는 기존 방식을 고수했고, 결정적으로 마이클 조던이 처음 계약을 타진한 곳도 컨버스였지만 나이키가 5년간 250만 달러와 로열티를 제시하며 조던을 데려갔다.

올림픽이라는 또 다른 격전지

스타 선수 계약 경쟁은 올림픽 무대로도 이어졌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앞두고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각국 대표팀과 개별 선수들의 후원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으며, 이 대회는 미국 자국에서 열린 데다 방송 중계 규모도 컸던 만큼 두 브랜드 모두 마케팅 예산을 크게 늘렸다. 프로 리그와 올림픽이라는 두 개의 무대에서 동시에 경쟁이 벌어지면서, 80년대 중반은 스니커즈 마케팅 경쟁이 가장 뜨거웠던 시기로 남는다.

신발 상자도 수집 대상이 되다

이 시기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신발 자체만�이 아니라 포장 상자 디자인에도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에어 조던의 초기 상자 디자인은 오늘날 신발과 별개로 그 자체가 수집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상자가 온전히 보존된 상태의 신발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포장까지 브랜드 경험의 일부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컨버스의 절대 강자 지위를 뒤흔든 것은 결국 신발의 기능이 아니라, 한 선수와 하나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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