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자국 하나가 뒤집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표

물 자국 하나가 뒤집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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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티카의 액션카드 두 장은 같은 나흘,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넉 달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담고 있다. 한 장은 젖은 바닥 하나가 발표를 뒤집은 순간을, 다른 한 장은 그 발표조차 완전한 진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까지의 시간을 담았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에서

1987년 1월 14일, 22살 대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조사실에서 숨졌다. 그날 밤, 경찰은 곧바로 시신을 화장할 계획을 세웠다.

유족의 동의는 없었다. 이 계획을 막아선 사람은 최환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검사였다. 그는 사체보존명령을 내려 화장을 일단 저지했다. 시신이 사라졌다면 부검도, 훗날의 재조사도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검사 한 명의 판단이, 이후 몇 달에 걸쳐 이어질 진실 규명의 첫 단추가 됐다.

이 장면을 카드로 옮길 때 제일 오래 망설였다. 한 사람의 판단이 없었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텐데, 그걸 카드 한 장의 효과로 요약하는 순간 그 판단의 무게가 빠진다.

바닥에 흥건했던 물

1월 15일 저녁, 한양대병원에서 부검이 이뤄졌다. 이튿날인 1월 16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마이크 앞에 섰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했는데,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발표문만 보면 그냥 불운한 사고사였다.

그런데 이 발표를 그대로 믿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사망 당일 현장에 도착했던 부검의 오연상은 동아일보 취재진에게 “현장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고 털어놓았다. 냉수 몇 컵을 마시다 쓰러진 사람의 방이라기엔, 바닥이 너무 젖어 있었다. 의사 한 사람의 짧은 목격담이 없었다면, 이 균열은 그대로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

물이 흥건했다는 한 문장이 전부였다. 무언가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계기는 대개 이 정도 크기다.

나흘 만에 뒤집힌 발표, 그러나 절반의 진실

물음은 나흘을 넘기지 못했다. 1월 19일, 치안본부장은 처음 발표를 뒤집었다. “머리를 욕조에 한 차례 집어넣었다 내놓았으며, 계속 진술을 거부하자 다시 집어넣는 과정에서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사했다.” 냉수 몇 컵이 물고문으로, 갑작스러운 쓰러짐이 질식사로 바뀌는 데 걸린 시간은 단 나흘이었다.

나흘이 짧아 보이지만, 그건 발표가 틀렸다는 걸 밝히는 데 걸린 시간이 아니라 인정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하지만 이 시인에도 절반의 거짓이 섞여 있었다. 실제로는 5명이 가담한 고문을, 조한경·강진규 2명만 가담한 것으로 축소해 발표했기 때문이다. 완전한 은폐가 불가능해지자, 다음으로 택한 건 축소였다.

회유를 물리친 부검 보고서

1월 17일, 부검을 담당했던 황적준 박사는 정식 부검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과정에서 군과 경찰 쪽의 압박과 회유가 있었다고 훗날 알려졌다.

사인을 애매하게 적어달라는 요구를 물리치고, 그는 소견을 있는 그대로 적었다. 검사의 사체보존명령, 부검의의 목격담에 이어 이번에는 부검 보고서 자체가 세 번째 저지선이 된 셈이다. 한 사람의 소신이 흔들렸다면, 물증 자체가 처음부터 다르게 기록됐을 수도 있었다.

벽제 화장터, 두 번째 저지 시도

시신을 태워 없애면 물증도, 부검 결과도, 재조사의 가능성도 함께 사라진다.

유족이 끝까지 화장에 동의하지 않고 버텼다는 사실도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자식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고 버틴 그 시간이, 결과적으로 진실 규명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저지선이 됐다.

넉 달 뒤, 강단 위에서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자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새로운 사실을 폭로했다.

대공간부의 주도 아래 실제로는 5명이 가담한 고문을 2명만 가담한 것으로 꾸몄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이 건네졌다는 내용이었다. 1월의 시인 발표가 절반의 진실이었다는 사실이, 넉 달이 지나서야 완전히 드러난 셈이다.

검사 한 명, 부검의 한 명, 취재진, 그리고 사제단까지 — 서로 다른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진실 쪽으로 사건을 밀어붙인 결과였다. 이 사건은 그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주요 도화선 중 하나가 됐다.

나흘과 넉 달, 날짜별로

날짜사건
1987-01-14박종철 사망, 화장 계획을 최환 검사가 저지
1987-01-15한양대병원 부검 실시
1987-01-16치안본부 “쇼크사” 발표 / 오연상 “물 흥건” 증언
1987-01-17황적준 박사, 부검 보고서 작성
1987-01-19물고문 시인, 2명만 구속 (실제 5명 중 축소)
1987-05-18사제단 김승훈 신부, 축소·은폐 폭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전개 연표 ·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카드 두 장에 담은 기록

폴리티카에서 이 사건을 다룰 때 가장 고민한 건 표현의 수위였다. 고문 장면을 자극적으로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첫 번째 카드에는 젖은 바닥과 정정 발표 날짜만, 두 번째 카드에는 화장 저지와 넉 달 뒤의 폭로까지 이어지는 저지선의 순서만 담기로 했다.

자극이 아니라 사실의 무게로 승부하고 싶었다. 검사 한 명의 결단, 유족의 저항, 몇 달 뒤 사제단의 폭로까지 — 이 사건이 완전히 묻히지 않은 데는 여러 사람의 개입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이 시리즈의 출발점인 정치 카드게임 폴리티카(PolitiCA)의 시작에서 밝혔듯, 사실과 발표 사이의 간극을 줄이겠다는 마음이 이 프로젝트의 동기였다.

39년이 지나도 유효한 질문

기록을 다루는 사람이 현장을 직접 확인하는 절차가 왜 필요한지, 이 사건은 39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사례로 남아 있다. 기록되지 않으면, 없었던 일이 된다. 폴리티카 카드 뒷면에 짧게 남긴 이 문구는, 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이 사건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폴리티카 시리즈의 다른 카드들과도 맞닿아 있다. 같은 시기 10월 유신으로 시작된 통제와 검열의 15년이 쌓이지 않았다면, 이 한 장의 폭로가 그해 여름 명동성당 농성으로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남영동 509호, 지금은

박종철이 조사받던 남영동 대공분실은 2018년 12월, 정부가 시민사회에 관리를 이관하며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전환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지금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운영하며 4층에 박종철 기념관을 두고 있다.

고문이 벌어졌던 건물이 그 사건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바뀌기까지, 다시 30년 넘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물 한 방울, 검사 한 명의 서명, 부검의의 짧은 진술 — 그날의 작은 저항들이 없었다면, 이 건물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남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바닥에 남은 물 몇 방울이, 국가의 발표문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화장로 앞에서 멈춰선 진실은, 넉 달 뒤 강단 위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사진: José Manuel Suárez, Wikimedia Commons (CC BY 2.0) ·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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