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수원 못골시장. 문화부 지원사업을 실행하러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다.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이라 서류만큼이나 발품이 많았고, 상인들을 만나고 골목을 걷고 가게마다 인사를 하며 사업을 전개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시장을 드나들다 보니 유독 자주 소통하는 분이 계셨다. 당시 그 시장의 상인회장님이었다.
일 때문에 만난 사이였다. 그런데 대화가 자꾸 길어졌다. 시장 이야기를 하다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다시 그가 살아온 이야기로 흘러가곤 했고, 시장통 한켠에서 반나절씩 이야기를 나누는 날도 드물지 않았다. 일로 시작한 관계가 어느새 인간적인 신뢰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수원시 시의원에 출마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도와달라는 그의 요청에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의 선거캠프에 들어갔고, 결과는 당선으로 이어졌다. 캠프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발로 뛰는 쪽보다는 손으로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 선거 포스터와 현수막, 유세용 인쇄물 같은 디자인 작업을 주로 맡았는데, 화려한 조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몇몇이 시안을 고치고 수정사안을 이야기하는 정도의 작은 캠프였다. 그런데 그 며칠이 지금 생각해도 묘하게 강렬하다. 평생 정치와는 무관하게 살아온 내가, 누군가를 당선시키는 과정에 처음으로 직접 발을 담근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유산이 없던 자리
돌이켜보면 그전까지 나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대학교에서 총학생회장을 맡은 적은 있지만, 그 학교는 2000년에 개교한 신생 학교였고 나는 그 학교의 초대회장이었다. 물려받을 선배가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어떤 조직이든 관행이나 정치적 감각은 대개 앞선 세대에게서 자연스럽게 전수되기 마련인데, 나에게는 그런 유산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참고할 선례도, 조언해줄 선배도 없이 처음부터 혼자 판단하고 부딪히며 수행해나가야 했다. 내 또래에게 있을 법한 투쟁이라 하면 ‘등록금 투쟁’ 정도였을까? 학생 운동이라는 단어는 이미 먼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지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 내가 생면부지의 선거캠프에 들어가 손을 보태게 된 건, 순전히 못골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그 상인회장 한 분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선거를 도우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 나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데려갔다. 노사모의 회원이었던 그 분의 이력도 한 몫을 했겠지만, 선거판 언저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부쩍 자주 접하게 됐고, 그 무렵부터 나는 이상하리만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할수록 벌어진 간극
처음엔 그냥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자료와 정보를 하나둘 접할수록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사실로서의 노무현과, 언론이 재구성해서 전달하는 노무현 사이의 간극이 지나치게 컸던 것이다. 그가 실제로 했던 말과 행동, 그리고 그것이 기사화되는 방식은 종종 전혀 다른 이야기로 둔갑해 있었다. 하나의 발언이 맥락 없이 잘려나가 전혀 다른 뜻으로 읽히는 경우도 많았고, 같은 사건을 두고도 어느 매체를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그려지곤 했다. 그 과정을 묘사하자면 꼭 한 사람이 여러 마리에게 승냥이(?)들에게 한꺼번에 물어뜯기는 장면으로 느껴졌었다.
그때 나는 20대 후반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껴진 부분에 대한 반작용을 행동으로 옮길 용기까지는 없었다. 온라인 게시판에 몇 마디 항변을 적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후회가 남긴 것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밀려온 감정은 슬픔보다 먼저 후회였다. 알면서도 나서지 못했다는 자책이었다. 그 후회는 생각보다 오래갔다. 몇 달이 지나고, 몇년이 지나도 문득문득 그 생각이 돌아왔고, 시간이 흐르며 그 자리에 하나의 다짐 같은 것이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팩트를 더 정확히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기성 언론이 짜놓은 프레임에 그만 휘둘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은 한 번 스치고 지나간 감정이 아니었다. 그 뒤로 꽤 오랜 시간 동안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직업이 바뀌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도 문득문득 그 간극이 떠올랐다. 사실과 해석 사이의 그 벌어진 틈을, 다시는 누구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언론을 탓하는 데서 그치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남길 수 있는 형태로 만들고 싶었다.
지금 이 카테고리에서 소개할 카드게임 ‘폴리티카’는, 결국 이 오래된 마음에서 출발한 기획이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재해석을 거치지 않은 그대로 카드 한 장에 담아 남겨두고 싶다는 것, 시간이 지나고 보면 역사의 한 단면이지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잊혀지고 만다. 역사의 순간을 박제하고 싶다는 마음이 이 프로젝트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동기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후회가 없었다면 이 프로젝트도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오래 걸려서야 도착한 결심이다.
사실과 해석이 갈라지는 시간부터 나는 카드게임 제작을 꿈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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