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 넘게 자기 세계관만으로 버텨온 카드게임이 있다. 매직 더 개더링(Magic: The Gathering)이다. 도미나리아, 라브니카, 이니스트라드 같은 낯선 이름의 행성들,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플레인즈워커들. 남의 IP를 빌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체 세계관으로 승부한 이 게임이 최근 업계에서 정반대의 비판을 받고 있다. 매직 더 개더링의 IP 자체가 약하다는 것이다.
세계관 없이도 성공한 게임이라는 역설
1993년 출시된 매직은 오리지널 IP TCG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가장 크게 살아남은 사례다. 위저즈 오브 더 코스트가 만든 이 게임은 포켓몬이나 유희왕처럼 만화·애니메이션의 인기를 등에 업지 않고, 순전히 카드 게임 자체의 완성도로 팬층을 넓혔다. 그런데 게임 매체 워게이머(Wargamer)는 최근 기사에서 이 성공 방식이 동시에 매직의 약점이라고 짚었다. 매직은 그 허구의 세계관 없이도 성공했고, 플레이어들이 카드를 고를 때 고려하는 건 스토리의 일관성이 아니라 순수한 게임플레이 경험이라는 것이다.
포켓몬TCG와 유희왕은 게임 시스템 자체가 IP의 판타지를 구현한다. 포켓몬을 잡고 진화시키는 규칙이 애니메이션 속 세계관과 그대로 맞물린다. 반면 매직의 핵심 개념인 “플레인즈워커”는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실제 플레이 감각과 설정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는 게 워게이머의 지적이다. 위저즈가 매직 세계관을 다룬 정식 소설을 활발히 출판하지 않는 이유도 팬덤이 그 정도로 스토리에 몰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뒤따른다.
그래서 던전앤드래곤, 문명, 아바타를 데려왔다
이 약점을 메우기 위해 위저즈가 택한 전략이 “유니버시즈 비욘드(Universes Beyond)”다. 던전앤드래곤, 문명, 반지의 제왕, 폴아웃, 워해머 40K 같은 외부 IP를 매직의 카드 시스템 위에 그대로 얹는 크로스오버 확장판 시리즈다. 스포츠키다(Sportskeeda) 등 매체 보도에 따르면 아바타: 라스트 에어벤더 확장판도 올해 하반기 출시가 예정돼 있다. 겐콘(Gen Con) 2026 현장을 취재한 테크타임스 기사는 이런 IP 베팅이 이제 테이블탑 업계 전반의 생존 전략이 됐다고 평가했다.
흥미로운 건 매출 반응이다. 게이머 매체 더게이머(TheGamer)가 정리한 유니버시즈 비욘드 크로스오버 순위를 보면, 외부 IP를 빌려온 세트일수록 매출과 화제성이 크게 뛰는 경향이 뚜렷하다. 반대로 말하면, 매직 오리지널 세계관만으로 낸 신작 세트는 예전만큼의 반응을 끌어내기 어려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30년간 지켜온 자체 세계관이, 정작 매출을 지탱하는 건 남의 이야기라는 아이러니. 이걸 두고 mtgrocks.com 같은 커뮤니티 매체는 “유니버시즈 비욘드가 감춰온 문제”라고 표현했다.
숫자로 보면 이 흐름은 더 뚜렷하다. 반지의 제왕 세계관을 빌려온 “테일즈 오브 미들어스” 세트는 출시 당시 매직 역대 판매량 2위에 올랐다고 게임 매체 스타시티게임즈와 워게이머가 나란히 보도했다. 그 뒤를 이은 파이널 판타지 크로스오버는 정식 출시 전부터 사전 예약만으로 역대 최고 판매 기록을 넘볼 거라는 전망이 draftsim.com 등에서 나왔다. 반면 매직 오리지널 세계관을 다룬 신작 세트가 이 정도 화제를 모은 사례는 최근 들어 찾아보기 어렵다. 30년간 쌓아온 도미나리아 세계관보다, 몇 년 빌려온 반지의 제왕과 파이널 판타지가 더 잘 팔린다는 사실은 이 게임의 진짜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30년을 쌓은 세계관을 가진 게임이 결국 남의 세계관을 사 온다는 건 좀 씁쓸한 장면이다. 다만 그게 실패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래 살아남으려면 자기 것만으로는 부족한 시점이 오는 것 같다.
오리지널 IP TCG의 딜레마
이처럼 처음부터 자기 세계관으로 시작한 카드게임은 대부분 같은 딜레마를 거친다. 세계관을 처음 만들 때는 자유롭지만, 그 세계관이 대중에게 각인될 만큼 강력해지지 않으면 결국 외부 IP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매직은 게임 시스템의 완성도로 30년을 버텼지만, 시스템만으로는 팬덤이 스스로 이야기를 확장하고 재생산하는 힘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세계관이 약하면 결국 남의 세계관을 사와야 한다, 이게 워게이머 기사가 던진 결론이다.
필자 개인의 매직 추억은 이미 다른 글에서 다룬 적이 있다. 그 글이 한 개인이 카드 한 장에 담았던 감정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글은 그 게임을 만든 회사가 30년 동안 붙들고 있는 산업적 숙제에 관한 이야기다. 추억과 사업은 다른 층위에서 움직인다.
우리가 다루려는 소재는 사 올 필요가 없다는 게 유일한 강점이다. 한국 현대사는 이미 충분히 극적이고, 문제는 그걸 어떻게 카드 한 장에 담느냐지 무엇을 담느냐가 아니다.
이미 강력한 서사를 가진 폴리티카
정치 테마 TCG 폴리티카를 준비하면서 이 딜레마를 들여다보면 다른 결론에 다다른다. 포켓몬은 처음부터 가상의 세계관을 만들어야 했지만, 한국 현대정치사는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출발선이 다르다. 세계관을 처음부터 지어내는 대신, 이미 벌어진 사건과 인물이라는 서사 자산을 다룬다는 점에서 매직이 30년을 들여 쌓아온 것을, 폴리티카는 시작부터 상당 부분 가지고 출발하는 셈이다.
다만 이 강점은 동시에 부담이기도 하다. 매직처럼 외부 세계관을 가져올 때는 라이선스 계약과 창작의 자유가 문제였다면, 폴리티카가 한국 현대정치사를 다룰 때는 사실관계와 균형 잡힌 시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부담의 종류는 다르지만, 세계관의 힘이 이미 확보돼 있다는 사실은 카드게임 하나를 설계하는 입장에서 분명 유리한 출발선이다.
매직이 결국 손을 내민 외부 세계관들
매직은 2020년대 들어 ‘유니버스 비욘드(Universes Beyond)’라는 이름으로 외부 IP와의 협업을 본격화했다. 처음에는 한정판 프로모션 카드 정도였지만, 2023년 6월 출시된 ‘반지의 제왕: 미들어스 이야기’는 정규 스탠다드 포맷에서 쓸 수 있는 첫 유니버스 비욘드 세트가 되면서, 외부 세계관이 더 이상 곁가지가 아니라 본편으로 들어왔음을 보여줬다.
| 연도 | 협업 IP | 비고 |
|---|---|---|
| 2021 | 포트나이트, 스트리트파이터 | 한정판 프로모션 카드 형태로 첫 공개 |
| 2022 | 워해머 40,000 | 커맨더 덱 형태로 출시 |
| 2023 | 반지의 제왕: 미들어스 이야기 | 스탠다드 포맷 정식 편입, 최초 사례 |
| 2024 | 폴아웃 | 커맨더 덱 형태로 출시 |
참고: Wizards of the Coast 공식 「On June 23, Experience Middle-earth Like Never Before」, MTG Wiki 「Universes Beyond」
매직이 30년째 세계관을 팔러 다니는 동안, 폴리티카의 세계관은 이미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