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립스크린 빈티지 캠코더를 손에 들고 촬영하는 모습

캠코더를 산 건 일본에 못 갔기 때문이다 — 2001년 겨울의 기록

zenithse
쿠팡 파트너스 활동 고지

하드디스크 한구석에 대학 시절 영상이 아직 남아 있다. 화질은 지금 기준으로 형편없고 대부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걸 찍은 카메라를 왜 샀는지 떠올리면 이야기가 좀 길어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에 못 가게 됐기 때문이다.

을지로 골목으로 출근하던 겨울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 입학까지 두어 달이 비었을 때, 친구 아버지가 을지로에서 하시던 전기자재 도매상에서 일할 기회를 주셨다.

7시까지 나가야 했다. 을지로의 아침은 그만큼 일찍 시작한다. 대신 퇴근은 다섯 시쯤이었고, 일이 없는 날은 더 일찍 보내주시기도 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끝에 네 평 남짓한 사무실이 있었고, 겨울이라 화로를 켜두고 그 앞에서 전표를 썼다. 주문 들어온 물건을 포장하고 송장을 적는 일이 하루의 대부분이었다.

창밖으로는 오토바이들이 지나다녔다. 을지로 보도블록은 울퉁불퉁한데 그 위로 사람 키만 한 짐을 싣고도 잘도 달렸다. 그 골목의 속도는 그 오토바이들이 정하고 있었다.

전선 종류가 그렇게 많은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다만 석 달 동안 배운 게 전선 지식이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일하는 습관을 처음 익힌 시간이었다. 정해진 시각에 일어나고, 정해진 순서로 하루를 통과하는 것. 그게 전부인데 그게 제일 어려웠다.

친구 아버지는 사무실에 하루 한 시간도 계시지 않았다. 가르쳐주신다기보다 자리를 내주신 쪽에 가까웠다.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자체가 큰일이다. 작은 상가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을 풀타임으로 석 달 쓴다는 건 인건비만 따져도 쉬운 결정이 아니다. 일손이 필요했다기보다 대학 가기 전에 뭐라도 겪어보라는 쪽이었을 것이다.

월급은 현금 봉투였다. 동전까지 들어 있었다. 차비와 밥값을 빼면 거의 쓰지 않고 모았다. 쓸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쓸 데가 정해져 있어서였다.

49일짜리 계획

그 무렵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행사의 참가자 모집 광고를 신문에서 봤다. 정식 명칭은 「2001 평화의 행진」, 한·일 청년이 함께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한다는 기획이었다. 조건이 특이했다. 한국에서 18일, 일본에서 31일, 합쳐서 49일 동안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행렬에 참여한다는 기획이었다. 참가비는 200만 원 상당이었다.

그런데도 지원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때까지 해외에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같은 돈으로 일본에서 한 달을 보낼 방법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겨울 내내 받은 월급을 모아 참가비를 입금하고 여름을 기다렸다.

조선시대 통신사와 토막 비교

조선이 일본에 보낸 통신사는 1428년부터 1811년에 걸쳐 총 20회 파견됐다.

당시에는 배로 건너가 걸어서 움직이는 행렬이었기 때문에 한 번 다녀오는 데에는 대개 5개월에서 8개월이 걸렸고, 계절이 어긋나면 2년을 넘기기도 했다고 한다. 배와 발로 움직이던 여정이니 당연한 숫자다. 그걸 49일로 압축한 게 그 기획이었던 셈인데, 여름방학 중으로 계획된 그 49일의 일정은 나한테 너무나도 기대되는 여름이었다.

2001년, 한-일 교과서문제 발발

그 여름은 오지 않았다. 봄에 한일 교과서 문제가 터졌다. 일본 문부과학성 검정에서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2002년부터 중학교에서 쓸 교과서로 통과됐고, 한국 정부는 강경 대응에 들어갔다. 국가기록원이 정리한 당시 조치를 보면 일본 대중문화 후속 개방이 중단됐고, 한일 군사교류가 보류됐으며, 양국 간 민간 및 청소년 교류가 축소됐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49일을 보내는 기획이 그 흐름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2001년 7월 18일, 추진위원회가 행사를 접는다고 발표했다. 상임위원장 이원식 한림대 교수 등 3인 명의였다. 발표문은 이렇게 적었다 — 양국 청년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준비한 행사인데, 일본이 역사 왜곡으로 잘못을 부정하고 차세대에게 그른 역사를 가르치려는 상황에서는 치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이듬해로 연기한다는 표현이었지만 참가자에게는 무산 통보였고, 실제로 그해에 행렬은 없었다.

추진위가 덧붙인 설명이 오래 남았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이 임진왜란에 대해 사죄하고 선진 문화국인 조선에 사절단을 보내달라고 요청해 파견된 외교사절단인데, 일본 교과서는 그 파견 동기를 빼고 결과만 적었다는 것이다. 부산 초량에 일본인이 머물도록 내준 왜관을 조선 안의 일본 영토처럼 서술한 대목도 함께 지적했다. 행렬을 재현하려던 사람들이 행렬을 접으면서 남긴 말이라 무게가 달랐다.

참가비는 그해 가을쯤에야 돌아왔다. 돈을 손에 쥐고 나니 뒤늦게 억울했다. 겨울 내내 일해서 모은 돈을 여름만 바라보며 묻어뒀는데, 열 달이 넘게 지나 그냥 숫자로 되돌아온 셈이었다. 여행도 사라지고 시간도 사라졌는데 원금만 남아 있었다.

남대문 상가에서 고른 물건

그래서 그 돈은 그만한 무게가 있는 데 쓰고 싶었다. 당시 나는 대학 방송국에서 교내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었고, 남은 대학 생활을 영상으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건 장비를 사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신문 광고를 보면서부터 군침을 닦아냈다. 친구 하나를 데리고 남대문 상가를 일고여덟 군데쯤 기웃거렸다. 진열장에는 400만 원, 600만 원짜리도 있었고 갖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다만 그건 처음부터 보러 간 물건이 아니었다.

지금 돌아보면 시기가 절묘했다. 캠코더는 엄청나게 귀한 물건에서 살짝 「가질 만한 물건」으로 막 내려오던 참이었다. 몇 해만 빨랐어도 200만 원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었을 것이고, 몇 해 뒤였다면 굳이 이렇게 큰돈을 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 좁은 구간에 내 석 달치 월급이 놓여 있었다.

200만 원이라는 예산에 맞춰 고른 것이 JVC 제품이었다. 2001년 겨울이다. 정확한 모델명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캠코더가 개인 기록 장치였던 시절

지금은 주머니에서 꺼내 바로 찍지만, 그때 영상을 남기려면 별도의 기계를 사야 했다. 그리고 그 기계는 진영이 갈려 있었다. JVC는 자기가 만든 VHS-C를 밀었고 소니는 8mm 계열(Video8·Hi8)로 맞섰다. 두 규격은 정면 경쟁 관계였고, 한쪽 진영 회사가 다른 쪽 규격을 만드는 일은 없었다. 2001년이면 그 싸움의 무게중심이 이미 디지털로 넘어가던 무렵이었다.

그 시절 캠코더를 산다는 건 카메라 한 대를 사는 게 아니라 기록 방식을 하나 고르는 일이었다. 테이프를 계속 사야 했고, 쌓일 자리를 마련해야 했고, 나중에 무엇으로 볼지까지 같이 정해야 했다. 200만 원이 아깝지 않으려면 실제로 계속 찍는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찍는 것보다 그다음이 더 문제였다. 그때 방송국에는 캡처보드가 달린 편집 전용 PC가 아직 없었다. 방송제를 준비할 때는 시간당 얼마씩 내고 쓰는 영상 편집실을 빌려서 프리미어로 붙였다. 돈을 내고 들어가 앉아 있으면 시계가 보인다. 컷 하나를 고민하는 시간이 그대로 요금이 되니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를 촬영할 때부터 생각하게 됐다.

지금은 찍는 것도 자르는 것도 같은 기계 안에서 끝난다. 그 시절에는 찍는 기계와 자르는 자리가 따로 있었고, 둘 사이를 테이프가 오갔다. 번거로웠지만 그 번거로움이 편집이라는 작업을 따로 배우게 만들었다.

그래서 무엇을 찍었나

별걸 다 찍었다. 성년의날에 선물이 잔뜩 도착했을 때도 카메라를 들었고,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아침이 되도록 일어나지 못하는 룸메이트의 처절한 얼굴도 찍었다. 전공이 전통조경이라 답사가 잦았는데 문화재 앞에서도 어김없이 켰다. 그때 사랑하던 사람도 찍었다.

돌이켜보면 기준 같은 건 없었다. 대단한 장면을 골라 찍은 게 아니라 카메라가 손에 있으니까 찍었다. 200만 원짜리를 샀으니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마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무분별함이 지금 보면 맞는 선택이었다. 중요한 장면만 골라 찍었다면 남는 게 훨씬 적었을 테니까.

일본에서 보낼 뻔했던 49일과 이 장면들을 바꾼 셈이다. 그때는 억울했고 한참 뒤에야 나쁘지 않은 교환이었다고 생각하게 됐다. 계획대로 갔다면 남았을 것은 49일치 여행 기억이었을 텐데, 대신 남은 건 그보다 시시하고 훨씬 긴 시간이었다.

참고: 서울신문 2001년 7월 19일자 「日조선통신사 행렬 재현행사 취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통신사」, 국가기록원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 Wikipedia 「VH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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