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은판에서 시작된 일
1839년,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는 은도금 동판에 빛으로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노출 시간만 수십 분이 걸렸고, 결과물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원본이었다. 복제도, 인화도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이 다게레오타입은 “그림 없이 진짜 모습을 남긴다”는 것만으로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다. 지금 스마트폰으로 하루에도 수십 장씩 찍어 지우는 사진의 뿌리가, 사실은 이 느리고 손이 많이 가던 은판 한 장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카메라가 손안에 들어오기까지
반세기 가까이 사진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그 벽을 처음 허문 건 조지 이스트먼의 코닥이다. 1888년 코닥은 롤필름을 내장한 카메라를 내놓으면서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합니다”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촬영자는 필름을 갈아 끼울 필요 없이 카메라째로 회사에 보내면, 현상된 사진과 새 필름을 넣은 카메라를 돌려받았다. 1900년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단돈 1달러짜리 브라우니 카메라가 등장한다. 사진이 부유층의 취미에서 보통 사람의 일상으로 넘어온 결정적 순간이었다.
주머니에 들어가는 크기의 혁명
1925년 독일에서 나온 라이카는 크기 자체가 메시지였다. 기존 카메라들이 삼각대 없이는 쓰기 힘든 덩치였던 반면, 라이카는 35mm 필름을 쓰는 소형 바디로 한 손에 들고 다니며 순간을 낚아챌 수 있게 설계됐다. 이때부터 사진은 “차려놓고 찍는 것”에서 “지나가는 순간을 붙잡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기 시작한다. 지금도 스트리트 사진가들이 라이카를 이야기할 때 화질보다 먼저 이 ‘기동성’을 언급하는 이유다.
색이 입혀지다
흑백의 시대는 1935년 코닥크롬의 등장으로 저물기 시작했다. 처음엔 16mm 영화용 필름으로 출시됐고, 이듬해 35mm 스틸 카메라용으로도 나오면서 일반 소비자도 컬러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다. 이후 수십 년간 코닥크롬은 여행 사진, 잡지 화보,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표준 필름으로 군림했다.
정점과 균열이 같은 시대에
1959년 니콘이 내놓은 첫 SLR 카메라 니콘 F는 이후 수십 년간 전문 사진가들의 표준 장비가 된다. 렌즈를 갈아 끼우며 원하는 화각을 만들고, 뷰파인더로 실제 노출을 확인하는 방식은 이후 카메라 설계의 기본 문법이 됐다. 1977년에는 코니카가 세계 최초의 양산형 오토포커스 카메라 C35 AF를 선보이며, 초점을 사람이 직접 맞추던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필름 산업의 균열은 같은 시기, 같은 회사의 실험실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1975년 코닥 엔지니어 스티브 새슨은 흑백 100×100 픽셀짜리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 시제품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코닥 스스로 이 기술이 필름 사업을 무너뜨릴 것을 우려해 상용화를 미뤘다는 점이다. 그 억제는 20년 넘게 이어졌지만, 1998년 일본 카메라 업체들이 보급형 디지털카메라를 쏟아내면서 필름 시장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필름의 대명사’였던 코닥은 2012년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스스로 만든 미래에 스스로 잠식당한 셈이다.
멈췄던 필름이 다시 돌아가는 이유
디지털이 완전히 자리 잡은 뒤 필름은 한동안 애호가들만의 물건으로 남는 듯했다. 그런데 2023년 한 해 전 세계에서 팔린 필름롤은 2천만 개를 넘어섰고, 이는 전년 대비 15% 늘어난 수치다. 100년 넘게 이어진 이 연대기가 흥미로운 건, 단순히 옛날 물건이 유행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결과를 곧바로 확인할 수 없다’는 필름 고유의 불편함이 지금은 오히려 매력으로 다시 읽히고 있다는 점이다.
돌아보면 이 100여 년의 흐름은 한 방향으로만 흘러오지 않았다. 카메라는 계속 작아지고, 빨라지고, 실패를 지워가는 쪽으로 진화했지만, 그 끝에서 사람들이 다시 찾은 건 크고 느리고 실패를 그대로 남기는 물건이었다. 기술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무엇을 편리함으로 여기고 무엇을 그리움으로 여기는지가 계속 자리를 바꿔온 역사이기도 하다.
다음 편에서는 이 100년의 역사 어딘가에서 갈라져 나와, 지금은 사진작가들 사이에서 ‘국민 카메라’로 불리는 리코 GR이 어떻게 그 별명을 얻게 됐는지를 다룬다.
발명은 늘 편리함을 향했지만, 결국 사람들이 그리워한 건 불편함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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