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에 놓인 빈티지 브라운관(CRT) TV

브라운관 TV(CRT), 화질은 나쁜데 왜 그리울까

zenith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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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고 무겁고, 화면 가장자리는 살짝 휘어 보이고, 가까이 다가가면 가로줄까지 눈에 들어온다. 지금 기준으로는 어느 것 하나 장점이라 할 게 없는 화면이다. 그런데 일부 레트로 게이머와 수집가들은 여전히 이 브라운관(CRT) TV를 일부러 찾아다닌다. 화질만 놓고 보면 설명이 안 되는 이 애착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일부 게임은 브라운관 TV에서만 작동한다

패미컴의 광선총 컨트롤러(재퍼)는 액정 화면에서는 아예 작동하지 않는다. 원리를 뜯어보면 이유가 분명해진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게임은 화면 전체를 한 프레임 동안 검게 만들고, 다음 프레임에 표적만 하얗게 띄운다. 총구의 광센서가 그 밝기 변화를 읽어 명중 여부를 판정하는 것이다. 이 판정은 화면이 신호를 받는 즉시 그려진다는 전제 위에 서 있는데, 요즘 평판 디스플레이는 처리 지연 때문에 그 전제를 깨뜨린다. 재퍼가 평판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위키백과 문서에 별도 항목으로 박제돼 있을 정도다. 오리사냥을 제대로 즐기려면 브라운관은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 필수인 셈이다.

기숙사에서 쓰던 PC 모니터도 CRT였다. 게임에 빠져 있던 시절인데, 침대에 누워서도 화면이 보이게 하겠다고 모니터를 통째로 눕혀놓은 적이 있다. 얼굴 방향에 맞춰서.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으니 기계를 통째로 돌려놓는 것 말고 방법이 없었다. 그 무게와 두께를 생각하면 지금은 못 할 짓이고, 당시에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나중에 룸메이트가 이런 말을 했다. 아침밥 먹으러 갈 때도 게임을 하고 있고, 수업 다녀와도 게임을 하고 있고, 자려고 누울 때도 게임을 하고 있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또 게임을 하고 있더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지연 없는 화면 — 브라운관 TV의 기술적 정직함

그리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여기 있다. CRT는 프레임을 버퍼에 쌓았다가 내보내는 방식이 아니라, 들어오는 신호를 전자빔이 위에서 아래로 그리는 즉시 표시한다. 영국의 AV 전문지 왓하이파이는 이 반응 속도를 “나노초 단위”라고 표현했다. 게다가 브라운관에는 고정된 픽셀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 — 화면은 연속된 인광체의 줄이고, 어떤 해상도가 들어와도 자연스럽게 뭉개지며 섞인다. 8비트·16비트 시절 게임은 애초에 이 특성에 맞춰 설계됐기 때문에, 최신 OLED에서는 어색해지는 타이밍 감각과 도트 그래픽의 질감이 브라운관에서는 그대로 살아난다. 당시 디자이너들은 스캔라인과 색 번짐까지 계산에 넣고 그림을 그렸다. 고전 게임의 HD 리마스터가 아무리 선명해도 원래 느낌을 못 살린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이고, 추억 미화가 아니라 실제로 브라운관에서 그래픽이 더 좋아 보였다는 게 고전 게이머들의 공통된 경험담이다.

흥미로운 건 이 질감이 이제 공식 기능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닌텐도는 스위치의 고전게임 서비스에 ‘CRT 필터’ 모드를 넣으면서 공식 설명에 이렇게 적었다 — “스캔라인까지 포함해, 옛날 TV처럼 보입니다.” 결점이라 불리던 특성이 복원해야 할 사양이 된 것이다. 다만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소프트웨어 필터가 실제 브라운관의 발색과 잔상감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다는 의견이 많고, 결국 진짜를 원하는 사람들은 원본 기기를 구해서 쓰는 쪽을 택하게 된다.

화질이 나쁜데 왜 그립냐는 질문에 오래 답을 못 했다. 지연이 없다는 걸 알고 나서야 정리가 됐다. 그리운 건 화질이 아니라 반응이었다.

2008년, 트리니트론이 멈추던 날

그 원본 기기는 이제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니는 2008년 3월, 40년간 약 2억 8천만 대가 팔린 트리니트론 브라운관의 단종을 발표했다. LG전자는 2010년 브라운관 TV의 국내 생산을 멈췄고 — 당시 국내 판매 비중은 3%까지 줄어 있었다 — 2013년에는 생산을 완전히 종료했다. 종료 직전까지도 연간 500만 대를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게 읽힌다. 주요 제조사의 브라운관 TV 생산이 그렇게 차례로 끝났고, 시장에 새 물량은 사실상 더해지지 않고 있다. 수집 시장이라는 게 성립하는 가장 단순한 조건이 이렇게 갖춰졌다.

국산 1호 TV도 브라운관이었다

한국에서 브라운관의 자리는 좀 더 각별하다. 국산 1호 TV인 금성사 VD-191이 바로 19인치 흑백 브라운관이었다. 1966년 8월에 나왔고, 값은 6만 원대 — 당시 도시 근로자 월평균 소득의 다섯 배가 넘는 금액이었는데도 사겠다는 사람이 몰려 추첨으로 팔았다. 이 모델은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가 됐고, 2022년 경매에는 시작가 2,500만 원에 나왔다. 거실의 중심에서 온 가족이 뉴스와 드라마를 보던 그 화면이, 반세기 만에 문화재이자 경매품이 된 것이다. 같은 물건이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이만큼 압축해서 보여주는 물건도 드물다.

국산 1호 TV가 브라운관이었다는 대목은 찾아보기 전까지 몰랐다.

지금 브라운관 TV를 구한다면

국내 중고 시장에서도 수요는 이미 숫자로 확인된 적이 있다. 2020년 G마켓의 브라운관 TV 판매는 전년 대비 40% 급증했고, 중고나라에서는 하루 30건 넘게 거래가 이뤄졌다. 시세는 3만 원 수준부터 시작하지만, 상태 좋은 소형 개체나 방송국에서 쓰던 업무용 모니터(PVM 계열)는 웃돈이 붙는다. 고를 때는 화면 잔상(번인)과 스피커 잡음부터 확인하고, RF 단자만 있는 구형보다는 컴포지트나 S-Video 단자가 있는 모델이 화질 손실이 적다. 14~20인치 소형 모델이 인기인 이유는 단순하다 — 두기 편하고, 옛 게임기와 연결하기 수월해서다. 전원을 켠 채 오래 방치된 개체는 부품 노화가 빨랐을 가능성이 높으니 실제 작동을 눈으로 확인하고 사는 편이 안전하다.

브랜드별 취향도 갈린다. 같은 브라운관이라도 소니 트리니트론, JVC, 도시바, 파나소닉이 저마다 다른 화면 질감을 갖고 있어서,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브랜드별 발색 비교까지 이뤄진다. 방송국과 편집실에서 쓰던 업무용 모니터가 특히 귀한 대접을 받는 이유도 분명하다 — 일반 TV보다 해상력이 높고, RGB 입력을 지원하며, 애초에 하루 종일 켜 두는 용도로 만들어져 내구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때 헐값에 버려지던 이 모니터들이 지금은 시세를 아는 판매자 손에서 값이 뛰었다.

들일 때는 나갈 때도 계산해야 한다. 32인치급은 무게가 45킬로그램을 넘고, 브라운관 유리에는 대당 1.8~3.6킬로그램의 납이 들어 있어 일반 쓰레기로 버릴 수 없는 물건이다. 평판 시대가 되면서 브라운관 유리의 재활용 시장 자체가 무너져, 처분이 구입보다 어려운 역설이 생겼다. 브라운관을 들인다는 건 화면 하나가 아니라 그 무게와 책임까지 들이는 일이다. 게임보이 같은 휴대기기 수집(게임보이는 왜 다시 인기일까)과는 각오의 단위가 다르다.

그럼에도 브라운관을 다시 들이는 사람들은 예전에 쓰던 게임기를 다락에서 꺼내 함께 연결해 본다. 전원을 켜는 순간의 ‘치직’ 소리, 정전기가 이는 화면에 손등의 털이 곤두서던 감각, 그리고 천천히 밝아지던 화면. 즉시 켜지는 요즘 디스플레이에는 없는 이 몇 초의 예열이, 그 시절을 통째로 소환하는 신호라는 걸 켜보는 순간 다시 알게 된다. 가장 좋은 화질이 아니라 가장 정직하게 만들어진 화면 — 그 화면 속에서 자란 세대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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