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역사 5가지, 워터맨 파카 몽블랑부터 최근 재조명까지

만년필 역사 5가지, 워터맨 파카 몽블랑부터 최근 재조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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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서랍을 열면 볼펜 사이에 낀 만년필 하나가 있다. 뚜껑을 열어본 지는 오래됐고, 잉크는 말라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버리지 않는다. 만년필이라는 물건은 그렇게 애매하게 오래 살아남는다. 스마트폰으로 메모하고 태블릿으로 서명하는 시대에, 굳이 잉크를 채우고 닙을 골라야 하는 필기구가 다시 팔린다는 사실은 좀 이상하게 들린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다. 2010년대 이후 만년필 판매량은 오히려 늘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이 물건이 어디서 왔고, 왜 한 번 밀려났다가 다시 서랍 밖으로 나왔는지 순서대로 짚어본다.

루이스 워터맨, 계약이 무산된 날 얻은 아이디어

만년필의 원형은 생각보다 오래됐다. 10세기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가 손에 잉크가 묻지 않는 펜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모세관 현상을 이용한 필기구 설계를 남겼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쓸 수 있는 물건으로 완성된 건 19세기 말이었다. 보험 영업을 하던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은 계약서에 서명을 받으려던 순간 손에 든 펜에서 잉크가 쏟아져 계약이 무산되는 일을 겪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경험이 그를 잉크 흐름을 조절하는 구조로 이끌었고, 1884년 무렵 지금 만년필의 원형이 될 모세관 급지 방식을 완성했다. 그의 이름을 딴 회사 워터맨(Waterman)은 이후 미국 만년필 시장을 오랫동안 이끌었다. 실수 하나가 만들어낸 발명이라는 점이 지금도 흥미롭다.

이런 기원담은 대체로 나중에 정리된 이야기라 나는 반쯤만 믿는 편이다. 다만 잉크가 새는 펜 때문에 계약을 놓친 사람이 잉크 흐름을 붙잡고 늘어졌다는 인과는 그럴듯하다. 발명은 대개 그 불편을 가장 크게 겪은 사람 쪽에서 나온다.

파카와 몽블랑, 만년필을 고급품으로 밀어올린 회사들

워터맨이 시장을 열어두자 경쟁자들이 뒤따라왔다. 셰퍼는 1912년 레버 필러 방식을 내놓아 잉크를 채우는 번거로움을 줄였고, 파커(Parker)는 안전 설계와 자체 필링 시스템으로 맞섰다. 독일에서는 펠리칸이 1929년 피스톤 필러 방식의 만년필을 내놓으며 유럽 시장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경쟁의 끝에서 지금까지 이름을 지킨 브랜드 중 하나가 몽블랑(Montblanc)이다. 몽블랑은 만년필을 실용품에서 신사의 소지품, 나아가 선물용 사치품으로 자리를 옮기는 데 성공했다. 지금 문구 매장에 가면 필기감보다 소재와 브랜드 이야기를 먼저 듣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흐름은 사실 100년 전 저 브랜드들이 살아남으려고 택한 전략에서 시작됐다.

닙과 잉크, 손끝에서 갈라지는 만년필의 필기감

만년필을 쓰는 사람들이 유난히 닙(펜촉) 이야기를 오래 하는 이유가 있다. 닙은 스테인리스 스틸이나 14K·18K 금으로 만들어지고, 끝부분에는 마모를 견디도록 백금계 합금을 덧붙인다고 알려져 있다. 이 닙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슬릿과 작은 숨구멍(브리더 홀)이 잉크를 모세관 현상으로 끌어올려 종이에 흘려보내는 구조다. 오픈 닙은 가장 보편적이지만 잉크가 잘 마르는 편이고, 셰퍼가 선보인 인레이드 닙처럼 몸체와 일체형으로 붙인 방식은 잉크 마름을 줄이는 대신 교체가 어렵다. 같은 브랜드, 같은 모델이라도 닙의 두께와 각도에 따라 필기감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게 만년필 애호가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다. 볼펜처럼 아무 데나 눌러 써도 되는 필기구가 아니라, 종이와 각도를 맞춰가며 손에 익혀야 하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손에 익혀야 하는 필기구라는 점에서, 이 물건이 왜 애매하게 오래 살아남았는지가 설명된다. 익히는 데 시간이 든 물건은 쉽게 못 버린다.

볼펜 이후의 쇠퇴, 그리고 만년필이 다시 돌아온 자리

20세기 중반, 더 싸고 더 편리한 볼펜이 등장하면서 만년필은 조용히 뒷자리로 밀려났다. 1960년대에 접어들며 볼펜 생산 기술이 다듬어지자 일상적인 필기 자리는 거의 볼펜 몫이 됐고, 잉크를 채우고 말리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만년필은 특수한 용도로만 남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010년대 들어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온라인 문구 전문점들이 늘고, 손글씨와 다이어리 문화가 다시 주목받으면서 만년필 판매량이 오히려 늘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손으로 쓰는 기록 도구에 대한 관심은 만년필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종이 다이어리와 시스템다이어리가 다시 팔리는 흐름도 같은 맥락에 있다. 손으로 쓰는 계획과 기록이 주는 감각은 디지털로 잘 대체되지 않는다. 만년필을 다시 꺼내 쓰는 사람들이 하는 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속도만큼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오히려 더 천천히, 더 오래 남는 글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만년필은 상장과 함께 받는 물건이었다. 쓰라고 준다기보다 준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선물이었고, 그래서 대개 서랍에서 말라갔다. 지금 팔리는 만년필은 반대로 쓰려고 사는 물건이라는 게 제일 큰 차이 같다.

한국에서 만년필이 다시 팔리는 이유

국내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구점 진열대 한쪽에 밀려나 있던 만년필 코너가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넓어졌다는 이야기를 문구 애호가들 사이에서 종종 듣는다. 다이어리 꾸미기, 손글씨 캘리그래피, 잉크 색상을 모으는 취미까지 겹치면서 만년필은 필기구를 넘어 취향을 드러내는 물건으로 다시 자리를 잡았다. 국산 브랜드도 이 흐름에 올라탔다. 가격대가 낮은 입문용 만년필이 늘면서, 예전처럼 값비싼 몽블랑이나 파카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도 줄었다. 만년필 하나로 시작해서 잉크, 종이, 필통까지 취미가 확장되는 경우가 흔하다는 점도 이 물건이 단순한 필기구 이상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증거다. 한 자루를 오래 쓰는 물건이라는 점 역시, 자주 바꿔야 하는 소모품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온다고 알려져 있다.

잉크 색을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는 쪽이 제일 그럴듯하다. 결국 사람들이 사는 건 펜이 아니라 색이다.

만년필은 결국 빠름을 포기하고 얻은 물건이다. 잉크를 채우는 시간, 닙을 고르는 시간, 종이와 각도를 맞추는 시간까지 전부 더한 뒤에야 한 줄을 쓸 수 있다. 그 느림을 굳이 다시 찾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이 물건이 아직 서랍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준다.

만년필을 바꾼 다섯 국면

시기사건
1884년경루이스 워터맨, 모세관 급지 구조의 만년필 완성
20세기 초파카·워터맨, 미국 만년필 시장 주도
20세기 초중반몽블랑 등 유럽 브랜드, 고급 필기구로 자리매김
1960년대~볼펜 대중화로 만년필 일상 필기 자리 축소
2010년대~손글씨·다이어리 문화 재조명, 판매량 반등
만년필 역사 주요 국면

책상 위에 놓고 쓰는 도구는 대체로 이 길을 걷는다. 계산 도구가 주판에서 계산기로 넘어온 과정도 같은 순서를 지났다.

참고: 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 「Lewis Edson Waterman」, Wikipedia 「Lewis Waterman」

한 줄을 쓰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그 한 줄을 오래 남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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