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주산·부기 자격시험 응시자는 120만 명을 넘었다. 2000년, 주산 응시자는 399명이었다. 11년 만에 3,000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그 사이 책상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따라가 본다 — 주판이 놓여 있던 자리에 카시오계산기가 올라앉은 이야기다. 주판이 조선에 들어온 지 400년, 한 시대를 통째로 차지했던 계산 도구가 바뀌는 데는 한 세대면 충분했다. 그 교체의 기록을 처음부터 따라가 본다.

1593년, 주판이 조선의 책상에 오르기까지
주판의 뿌리는 깊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3,000~4,000년 전에 널빤지에 모래나 분말을 놓아 셈하는 토사주판을 썼고, 이 계산 도구가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중국에서 오늘날의 알 달린 형태로 다듬어졌다. 조선에는 명나라 정대위의 수학책 『산법통종』이 1593년(선조 26)에 수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소개됐다. 다만 당시에는 산가지로 셈하는 방식이 이미 널리 퍼져 있어서, 주판은 오랫동안 일부 식자층의 도구에 머물렀다. 물건이 들어오는 것과 손에 익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던 셈이다.
주판의 여정에는 왕복 항로가 하나 숨어 있다. 조선의 주판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일본으로 건너가 널리 쓰였고, 일본에서 아랫알을 5개에서 4개로 줄여 개량한 윗알 1개·아랫알 4개짜리가 1932년에 거꾸로 한국에 들어왔다.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그 주판 모양이다. 윗알 하나가 5, 아랫알 하나가 1 — 알을 가운데 가름대 쪽으로 밀어 올리고 내리는 동작만으로 사칙연산을 처리하는 이 구조 덕에, 숙련자는 눈으로 숫자를 읽기 전에 손가락이 먼저 답에 가 있었다. 도구 하나가 전쟁을 따라 나갔다가 개량되어 돌아오는 데 340년이 걸린 셈이다.
340년이라는 숫자에서 잠깐 멈췄다. 나갔다가 고쳐져서 돌아오는 데 그만큼 걸렸다는 건, 그 사이 내내 이 물건이 누군가의 손에 쥐여 있었다는 뜻이다.
주산 교육 전성기 — 응시자 120만 명의 시대
확산은 20세기의 일이다. 식민지기인 1920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주산보급회를 조직하면서 보급이 시작됐고, 1936년에는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에서 주산경기대회가 열렸다. 광복 후 1950년대에 주산이 상업학교 정규 교육과정에 채택되고 1960년대에 문교부와 대한상공회의소가 1급부터 7급까지 검정을 실시하면서, 주판은 상업계 학생의 신분증 같은 물건이 됐다. 급수는 이력서에 적는 자격이었고, 취업을 준비하는 상업고 학생에게 주산 검정은 선택이 아니라 통과 의례였다. 전성기의 규모는 시험 통계가 말해 준다 — 1989년 주산·부기 검정 응시자는 120만 명을 넘었고, 누적 주산 자격 보유자는 442만 명에 달했다. 한 해에 인구의 3%가량이 주판 앞에 앉아 시험을 쳤다는 뜻이다. 교실에서, 학원에서, 시험장에서 주판알 튕기는 소리가 그치지 않던 시절이다.
카시오계산기의 등장 — 릴레이 341개에서 카시오미니까지
주판의 경쟁자는 바다 건너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1946년 도쿄에서 창업한 카시오의 전신 카시오제작소는 원래 담배를 끝까지 피우게 해 주는 반지형 파이프로 돈을 번 회사였다. 1954년 12월 전기식 소형 계산기의 시제품을 완성했고, 1957년 6월 릴레이 341개로 14자리 사칙연산을 해내는 세계 최초의 소형 전기식 계산기 ’14-A’를 내놓았다. 같은 달 세워진 법인의 이름이 ‘카시오계산기 주식회사’ — 회사 이름부터가 계산기였다. 1965년에는 메모리 기능을 갖춘 첫 전자식 탁상계산기 ‘001’을 내놓으며 릴레이 시대에서 전자 시대로 넘어갔다.
결정타는 1972년 8월의 카시오미니였다. 볼링장에서 점수를 손으로 셈하는 광경을 보고 “작고 싼 개인용 계산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에서 출발한 이 제품은, 경쟁품의 4분의 1 크기에 3분의 1 가격인 12,800엔으로 나왔다. 당시 업계에서는 월 1만 대면 성공이라 여겼는데 카시오는 월 10만 대를 목표로 걸었고, 결과는 그 이상이었다 — 출시 10개월 만에 100만 대, 누적 1,000만 대. 은행과 사무실의 비품이던 계산기가 이 물건을 기점으로 개인의 소지품이 됐다. 카시오계산기의 누적 판매량은 1980년 1억 대를 넘겼고, 2006년에는 10억 대를 돌파했다. 1974년 첫 포켓형 공학용 fx-10, 1985년 세계 최초의 그래프 계산기 fx-7000G, 수식을 교과서처럼 표시해 준 2004년의 fx-82ES까지 — 수험생 책상 위의 fx 시리즈가 그 뒤를 받쳤다.
2001년, 주산 자격시험이 폐지되다
계산기가 값싸고 작아질수록 주판의 자리는 좁아졌다. 1995년에는 경기상고·성덕여상·광주상고 등 전국 30여 개 상업고등학교가 주산·타자·부기 대신 전산 실무 교육을 채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 기존 상업학교 교육이 전산 실무 능력보다 주산·타자 능력에 초점이 맞춰져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진단과 함께였다. 주산과 나란히 교육과정에서 밀려난 타자의 이야기는 타자기 역사 100년에서 따로 다뤘는데, 두 과목의 퇴장 경로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검정 시험의 응시자 수는 그 퇴장을 연도별로 중계한다.
| 연도 | 주산·부기 검정 응시자 |
|---|---|
| 1989년 | 120만 명 이상 |
| 1997년 | 28,682명 |
| 1998년 | 22,302명 |
| 2000년 | 399명 (주산) |
결국 주산·부기 국가기술자격시험은 2001년부터 폐지됐다. 1999년 3,000명 안팎까지 내려앉은 응시자 수가 이듬해 세 자릿수로 떨어지자 더 버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폐지 사유는 건조했다 — 전자계산기와 컴퓨터 보급으로 자격증 수요가 사라졌고, 상업계 고교에서조차 더 이상 주산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 442만 명이 딴 자격증이 서류 한 장으로 역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120만 명이 응시하던 시험의 마지막 해 응시자가 399명이었다는 숫자는, 세대교체라는 말의 속도감을 이보다 잘 보여줄 수 없다.
442만 명이 딴 자격증이 서류 한 장으로 사라졌다는 문장에서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방과 후에 남아 손가락을 움직이던 시간은 어디로 갔나 싶은데, 그 시간이 헛됐다고 말할 근거도 딱히 없다. 도구가 없어진 거지 그걸 익힌 사람이 없어진 건 아니니까.
쌀집계산기와 주판, 뜻밖의 생존
승자인 카시오계산기 쪽에도 한국만의 각주가 붙었다. JS 시리즈, 특히 JS-40B는 시장 좌판과 동네 가게 계산대에서 하도 오래 쓰여 ‘쌀집계산기’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숫자가 이중사출로 박혀 있어 키가 닳아도 표기가 지워지지 않고, 버튼이 큼직해 눌리는 감이 분명하다. 이 모델은 단종된 골동품이 아니라 지금도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3만 원대에 팔리는 현역이고, 비슷하게 생긴 모방품이 여럿 나올 만큼 시장의 기준이 됐다. 공학용 fx-570ES 계열 역시 국가기술자격 수험생 커뮤니티에서 표준 대접을 받는다. 카시오는 2025년을 계산기 사업 60주년으로 기념하고 있다 — 1965년 첫 전자식 탁상계산기 ‘001’부터 센 숫자다.
JS-40B는 설명을 읽기 전에 사진부터 알아봤다. 문구점이든 정육점이든 계산대 옆에 늘 저게 있었다. 그때는 그냥 계산기라고 불렀지 따로 이름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패자인 주판도 죽지 않았다. 상업고 교실에서는 물러났지만, 어린이 교육 시장에서 수 감각과 집중력을 키우는 도구로 살아남았다. 근거 없는 향수 마케팅만은 아니다 — 아동 144명을 5년간 추적한 무작위 대조 연구에서, 주 2시간씩 주산식 암산 훈련을 받은 아이들은 계산 능력과 시공간 작업기억 과제에서 비교 집단을 앞섰다(지능검사 점수는 차이가 없었으니, 만능 두뇌 계발이라는 학원가의 오랜 광고 문구까지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장기 주산 훈련이 뇌 기능 네트워크의 연결 구조 변화와 연관된다는 후속 연구도 나와 있다. 문구점 한쪽의 어린이 주판과 시장 계산대의 쌀집계산기 — 서로를 밀어냈던 두 도구가 지금은 나란히, 각자 가장 잘하는 자리 하나씩을 지키고 있다. 세대교체의 끝은 소멸이 아니라 재배치였던 셈이다. 주판알을 튕기던 손끝과 카시오계산기 버튼을 누르던 손끝은, 도구만 달랐을 뿐 같은 셈을 하고 있었다.
지능검사에서는 차이가 없었다는 괄호가 이 문단에서 제일 정직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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