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 RICOH 로고가 선명한 컴팩트 필름카메라

리코 GR이 사진가들 사이에서 ‘국민 카메라’가 된 사연

주머니 속의 카메라가 왜 이렇게까지 사랑받을까

카메라 커뮤니티에서 리코 GR을 이야기할 때 유독 반복되는 문장이 있다. “이걸로 안 찍어본 사람은 있어도, 하나만 찍어본 사람은 없다.” 렌즈 하나 안 갈아 끼우는 콤팩트 카메라가, DSLR과 미러리스가 넘쳐나는 시대에도 여전히 신형이 나올 때마다 품절 대란을 일으킨다. 이 작은 카메라 하나가 어쩌다 사진가들 사이에서 사실상 ‘국민 카메라’로 불릴 정도의 위치에 올라섰는지, 그 30년 가까운 내력을 따라가 본다.

1996년, 필름으로 시작된 DNA

리코 GR의 시작은 디지털이 아니라 필름이었다. 1996년 10월 출시된 GR1은 28mm F2.8 렌즈를 얇은 콤팩트 바디에 눌러 담은 카메라였다. 당시 콤팩트 카메라들이 대체로 흐릿한 플라스틱 렌즈로 승부하던 시절, GR1은 프로 사진가가 서브 카메라로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아깝지 않을 만큼의 화질을 보여줬다. 이때 잡힌 “작지만 진지한 카메라”라는 성격이 이후 모든 GR 시리즈의 기준점이 된다.

2005년, 디지털로 넘어가며 지킨 것

디지털카메라가 시장을 완전히 뒤집던 2005년, 리코는 시리즈 최초의 디지털 모델인 GR 디지털을 내놓았다. 당시로선 준수한 수준인 약 813만 화소에, 1/1.8인치 CCD 센서를 얹었다. 화소 경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리코가 지킨 원칙은 단순했다. 몸체는 여전히 한 손에 잡히는 크기여야 하고, 렌즈는 여전히 스냅 촬영에 최적화돼야 한다는 것. 이 원칙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GR 시리즈 정체성의 핵심이다.

스냅포커스, 이 카메라를 다르게 만든 발명

GR을 단순한 ‘작은 카메라’에서 ‘거리 사진가의 도구’로 밀어 올린 결정적 기능은 스냅포커스다. 셔터를 끝까지 눌러버리면 자동초점을 무시하고 미리 정해둔 거리로 즉시 초점을 맞춘다. 오토포커스가 피사체를 찾느라 머뭇거리는 그 찰나에 결정적 순간은 이미 지나가 버리기 마련인데, 스냅포커스는 그 지연 자체를 아예 없애버린다.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거리 사진가들에게 이 기능은 단순한 편의 옵션이 아니라 존재 이유에 가까웠다.

2019년, GR III와 다시 불붙은 인기

2019년 출시된 GR III는 이 작은 카메라를 다시 한번 화제의 중심으로 올려놓았다. 여전히 28mm 화각을 고수하면서도 손떨림 보정과 센서를 개선해, 큰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 부담스러워하던 사람들까지 끌어들였다. 이후 나온 GR IIIx는 화각을 40mm로 바꿔 내놓았는데, 28mm가 익숙하지 않은 입문자에게는 오히려 40mm 쪽이 구도 잡기가 수월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나의 시리즈 안에서 두 개의 화각을 나란히 두고 사용자가 자기 시선에 맞는 쪽을 고르게 한 셈이다.

지금도 여전히 품절인 이유

큰 카메라를 하나 더 사는 대신, 이미 있는 카메라 가방 옆 주머니에 넣고 다닐 두 번째 카메라를 찾는 사람들에게 GR은 여전히 답이 되고 있다. 화질과 즉각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존재감을 최소화한다는, 언뜻 모순돼 보이는 두 가지 요구를 30년 가까이 큰 방향 전환 없이 지켜온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같은 콤팩트 하이엔드 카테고리에는 후지필름 X100 시리즈 같은 경쟁자도 있지만, 두 카메라가 겨냥하는 사용자는 결이 다르다는 평이 많다. X100 시리즈가 필름 시절 카메라를 떠올리게 하는 레트로 디자인과 하이브리드 뷰파인더로 ‘촬영하는 과정 자체의 즐거움’을 앞세운다면, GR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디자인적 향수 없이 오직 스냅 촬영의 속도와 휴대성에만 집중해왔다. 어느 쪽을 고르느냐는 결국 사진을 찍는 행위에서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선택인 셈이다. 중고 거래 커뮤니티에서 구형 GR 모델까지 꾸준히 거래가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 이 카메라를 한번 써본 사람들이 좀처럼 다른 카메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다음 편에서는 카메라를 벗어나, 아날로그 시계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들을 모아 답해본다.

가장 좋은 카메라는 지금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라는 말이 있다면, GR은 그 말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인 카메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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