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리티카의 카드 두 장은 같은 6일을 서로 다른 인물의 눈으로 담고 있다. 한 장은 성당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시위대를 지켰는지를, 다른 한 장은 그 안으로 걸어 들어온 뜻밖의 얼굴들을 담았다.
명동성당 농성은 공간의 힘과 참여자의 확산이 겹쳐지며 학생 운동을 시민 항쟁으로 바꿔놓은 6일이었다.
1987년 6월 10일, 성당으로 들어서다
1987년 6월 10일, 철거민 300여 명이 명동성당으로 들어섰다. 밤 10시경 인원은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처음엔 그저 몸을 피할 공간을 찾아 들어간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농성은 6월 15일까지, 꼬박 6일 동안 이어지게 된다.
왜 하필 성당이었나
경찰은 여느 때처럼 강제 해산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명동성당은 보통의 시위 현장과는 달랐다. 종교 시설이라는 성격 자체가, 공권력이 함부로 밀고 들어가기 어려운 상징적 방어막으로 작동했다.
공간이 사람을 지켰다는 게 이 6일의 핵심이라고 본다. 같은 인원이 길 한복판에 있었다면 첫날 밤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김병도 주임신부는 김수환 추기경의 재가를 얻어 수도권 사제 50여 명을 소집했고, 6월 12일 새벽 서울교구 사제단회의는 학생들의 민주화투쟁을 적극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몸으로 막겠다는 선언
6월 13일 새벽 1시경, 함세웅 신부는 농성자들 앞에서 “사제단이 앞장서서 경찰의 진입을 막겠다”고 밝혔다. 말뿐인 선언이 아니었다.
사제들이 실제로 성당 입구 쪽에 자리를 잡으며 물리적인 방벽 역할을 자처했다. 경찰이 성당 안으로 진입하려면 시위대가 아니라 사제들과 먼저 부딪혀야 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막겠다고 말하는 일과 실제로 앞에 서는 일 사이의 거리는 꽤 멀다.
농성 3일째, 넥타이를 맨 사람들
6월 12일 오전, 명동 일대의 풍경이 바뀌었다. 그전까지 농성을 채우던 얼굴은 대부분 대학생이었다.
그런데 이날부터 정장을 갖춰 입고 넥타이를 맨 회사원들이 하나둘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언론은 이들을 “넥타이부대”라고 불렀다.
넥타이부대라는 이름이 붙은 시점부터 이 사건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본다. 학생이 하는 일과 회사원도 하는 일을 사회는 다르게 취급한다. 카드를 두 장으로 나눈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근 사무실에서 점심시간이나 잠깐의 짬을 타 거리로 나온 회사원들이 몰려들면서, 명동 일대에는 1만여 명이 모여드는 대규모 시국토론회로 커졌다.
학생 운동에서 시민 항쟁으로
그때까지 시위의 주축은 대체로 대학생이었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하루하루 회사를 오가던 직장인들이 거리로 나섰다는 사실 자체가 상징적이었다.
넥타이부대의 등장은 이 항쟁이 더 이상 학생 운동이라는 이름표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회사원에게는 자리까지 걸린 선택이었는데도, 점심시간을 쪼개 명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이 확산은 이후 6월 26일 전국 동시다발 시위로까지 이어지며 6월항쟁 전체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스스로 문을 연 6일째
농성은 외부의 강제 진압이 아니라, 농성자들 스스로의 결정으로 끝났다. 6월 15일 오후 2시, 농성 해산을 알리는 성명이 발표됐고 성당 입구에서 해산식이 열렸다.
명동성당 주임신부가 “학교와 직장, 가정으로 돌아가 달라”고 권한 요청을 농성자들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경찰력으로 뚫지 못했던 6일이, 결국 대화로 마무리됐다는 점이 이 사건의 또 다른 얼굴이다.
농성 6일의 시간표
| 날짜 | 사건 |
|---|---|
| 1987-06-10 | 철거민·학생 300여 명 농성 시작, 밤 10시 1,000여 명으로 확대 |
| 1987-06-12 | 서울교구 사제단 지지 결의 / 넥타이부대 등장, 1만여 명 시국토론회 |
| 1987-06-13 | 함세웅 신부 “경찰 진입 막겠다” 선언, 사제단 물리적 방벽 형성 |
| 1987-06-15 | 농성 해산식, 자진 해산으로 6일 만에 종료 |
| 1987-06-26 | 전국 동시다발 국민평화대행진, 6월항쟁 절정 |
카드 두 장에 담은 6일
폴리티카에서 이 사건을 다룰 때 첫 번째 카드에는 공간이 시위대를 지키는 방벽이 되는 과정을, 두 번째 카드에는 참여자 수가 불어나는 확산의 속도를 담았다. 카드 한 장이 뒤집힐 때마다 판 위의 참여자 숫자가 불어나는 구조인데, 실제 역사에서 벌어진 그 확산의 속도를 게임 메커니즘으로 어떻게든 담아보고 싶었다. 시위의 규모가 커지는 계기가 항상 가장 급진적인 사람들의 합류가 아니라, 가장 평범해 보이던 사람들의 합류였다는 점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정치 카드게임 폴리티카(PolitiCA)의 시작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지금의 넥타이부대는 누구일까
“넥타이부대”라는 말은 그해 여름을 넘어서까지 오래 회자됐다. 특정 계층이나 조직이 아니라 “평소엔 정치와 거리를 두던 사람들”이 움직이는 순간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시위의 규모가 임계점을 넘는 계기는 대개 가장 급진적인 이들의 합류가 아니라, 가장 평범해 보이던 이들의 합류였다.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들 중 상당수가, 며칠 뒤에는 직접 거리로 내려왔다는 증언도 남아 있다.
공간이 사람을 지킨다는 것
명동성당 농성이 남긴 교훈은, 물리적 공간이 때로는 그 자체로 보호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명동성당이 아니었다면 농성 자체가 첫날 밤을 넘기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6일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폭로로 시작된 분노를, 학생만이 아니라 시민 전체의 참여로 넓혀놓았다.
경찰이 넘지 못한 건 담장이 아니라, 그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의 결심이었다. 그리고 그 담장 안으로,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걸어 들어왔다.
사진: Jeon Han, Korea.net,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 참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명동성당 농성사건」, 위키백과 「6월 민주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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