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카드로 만든 게 처음이 아니다, 트와일라잇 스트러글과 워게임의 계보

정치를 카드로 만든 게 처음이 아니다, 트와일라잇 스트러글과 워게임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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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카드 한 장씩을 손에 쥐고 마주 앉는다. 대사관도, 미사일도, 심지어 쿠바 미사일 위기까지 전부 카드로 존재한다. 냉전 전체를 보드 위에 옮겨놓은 이 게임의 이름은 트와일라잇 스트러글(Twilight Struggle). 정치를 카드로 만든다는 발상, 사실 처음이 아니었다.

지구상 최고의 보드게임이라 불린 냉전 시뮬레이션

2005년 GMT Games가 출시한 트와일라잇 스트러글은 미국과 소련, 두 플레이어가 각각 냉전기 초강대국을 맡아 전 세계 영향력을 두고 경쟁하는 보드게임이다. 게임에는 역사적 사진으로 삽화된 카드 103장이 들어 있는데, 마셜 플랜이나 탈스탈린화 같은 굵직한 사건부터, 소련을 방문한 미국 소녀 사만다 스미스의 일화처럼 자잘한 사건까지 두루 담겨 있다. 심지어 냉전을 다룬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워게임스》를 참조한 메타텍스트 카드도 있다. 위키피디아 정리에 따르면 이 게임은 보드게임긱(BoardGameGeek) 종합 평점 1위 자리를 2010년 12월부터 2016년 1월까지, 5년 넘게 지켰다. 이후 팬데믹 레거시 시리즈에 밀려났지만, 그 이전까지는 명실상부한 “역대 최고 평가 보드게임”이었다.

제작사 GMT Games 기준으로도 트와일라잇 스트러글은 역대 최고 판매작이다. 약 10만 부가 팔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워게임 장르에서는 이례적인 수치다. 2005년 찰스 로버츠상(Charles S. Roberts Award), 2006년 인터내셔널 게이머스 어워드까지 수상하며 평단과 시장 양쪽에서 인정받았다.

보드게임에 냉전을 넣는다는 발상 자체가 나는 좀 겁 없다고 생각한다. 재미있게 만들면 가볍다는 소리를 듣고, 무겁게 만들면 아무도 안 한다. 이 게임은 그 사이를 통과했다.

워게임이라는 장르, 정치를 처음 다룬 게 아니다

트와일라잇 스트러글이 유별난 사례가 아니라는 게 더 중요하다. GMT Games는 이 게임 말고도 실존 지도자와 실제 사건을 다룬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을 여러 편 만들어왔다. 히틀러의 부상과 몰락을 다루는 《히틀러스 라이히(Hitler’s Reich)》, 쿠바 미사일 위기 13일을 실시간처럼 재현하는 《13 데이즈(13 Days: The Cuban Missile Crisis)》가 대표적이다. 후자는 매체 데어윌비게임즈(There Will Be Games)가 “45분짜리 트와일라잇 스트러글”이라고 부를 만큼, 같은 소재를 더 짧고 압축된 형태로 재구성한 게임이다.

이런 게임들이 속한 장르를 업계에서는 “워게임” 혹은 “히스토리컬 시뮬레이션”이라 부른다. 콜드워 컨버세이션스(Cold War Conversations) 팟캐스트가 정리한 냉전 보드게임 목록만 봐도, 실존 정치인과 실제 협상 테이블을 소재로 삼은 게임이 한둘이 아니다. 이 장르의 팬들에게 실존 인물이 카드나 말판 위에 등장하는 건 낯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장르의 기본값에 가깝다. 다만 접근 방식이 다르다. 이들 게임은 인물을 희화화하거나 극적으로 각색하기보다, 실제 정책 결정과 역사적 선택지를 최대한 충실히 재현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

구체적인 게임 방식도 흥미롭다. 트와일라잇 스트러글은 “카드 드리븐 워게임(Card-Driven Wargame)”이라는 방식을 쓰는데, 손에 든 카드 한 장이 곧 그 시대의 특정 사건이고, 그 카드를 낼지 말지 선택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결정이 된다. 예를 들어 마셜 플랜 카드를 내면 서유럽에 영향력을 넓힐 수 있지만, 동시에 소련 쪽 카드에 이용당할 여지도 남는다. 카드 한 장 한 장이 단순한 능력치 스탯이 아니라, 실제 냉전에서 미국과 소련이 마주했던 딜레마 그 자체를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 설계 방식이 바로 “역사 시뮬레이션”이라는 평가를 받는 근거이기도 하다.

실존 인물을 카드로 만드는 일에는 반드시 반대가 따라붙는다. 다만 반대가 있다는 게 만들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아니라고 본다. 역사를 다루는 방식 중에 아무도 불편하지 않은 방식은 없다.

왜 굳이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카드로 만드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허구보다 실제 역사가 훨씬 더 긴장감 있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매체 미디엄(Medium)의 한 칼럼은 트와일라잇 스트러글을 “냉전을 서늘하게 재해석한 최고의 보드게임”이라 평하면서, 이 게임이 설계자들의 표현대로 “냉전의 내부 논리를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즉 이 게임의 재미는 가상의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로 벌어졌던 긴장과 선택에서 나온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하며 자연스럽게 냉전이라는 시대를 이해하게 되고, 이 게임을 “역사 교육 도구”로 평가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이 계보를 알고 나서 마음이 좀 편해졌다. 내가 하려는 게 유별난 시도가 아니라 이미 수십 년 된 장르 안에 있다는 뜻이니까.

폴리티카는 이 계보 위에 있다

정치테마 TCG 폴리티카(PolitiCA)를 구상하면서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 “정치인을 카드로 만드는 게 부적절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트와일라잇 스트러글을 들여다보면 답이 이미 나와 있다. 정치를 카드로 만드는 시도는 새로운 게 아니라, 이미 20년 넘게 이어져 온 정통 장르의 계보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카드 위에서 냉전을 벌였다면, 폴리티카는 한국 현대정치사의 인물과 사건을 카드 위에 올린다. 소재만 바뀌었을 뿐, 접근의 정신은 같다.

물론 워게임 장르가 걸어온 20년의 시간이 폴리티카에게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니다. 다만 최소한 이 장르가 상업적으로도, 평단에서도 이미 정당성을 증명해왔다는 사실은 분명한 참고점이 된다. 트와일라잇 스트러글이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를 대립하는 두 진영의 대표로 그리면서도 어느 한쪽을 일방적인 악으로 몰지 않았던 균형 감각, 그게 이 장르가 지금껏 살아남은 이유이자 폴리티카가 배워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역사를 게임으로 만드는 일,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문제는 얼마나 정확하게, 얼마나 균형 있게 만드느냐다.

트와일라잇 스트러글이 남긴 기록

2005년 GMT Games를 통해 처음 출시된 트와일라잇 스트러글은 아난다 굽타와 제이슨 매튜스 두 사람이 설계했다.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전 세계적 대립을 카드 한 벌로 압축한 이 게임은 출시 이후 오랫동안 보드게임긱(BoardGameGeek) 랭킹 1위 자리를 지키며, 정치·역사 소재 보드게임으로는 이례적인 대중적 성공을 거뒀다. 2025년에는 출시 20주년을 기념한 ‘홀 오브 페임 에디션’이 다시 발매됐다.

항목내용
출시연도2005년
디자이너아난다 굽타, 제이슨 매튜스
퍼블리셔GMT Games
소재1945~1989년 미·소 냉전
기록BGG 랭킹 장기간 1위, 2025년 20주년 에디션 발매
트와일라잇 스트러글 개요

참고: Wikipedia 「Twilight Struggle」, GMT Games 공식 「Twilight Struggle 20th Anniversary Hall of Fame Edition」

냉전을 카드로 옮긴 사람들이 있었기에, 한국 현대정치사를 카드로 옮기는 일도 낯설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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