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설비는 1990년대 이후 어떤 필름 제조사도 발주한 적이 없습니다.” 일포드 흑백필름을 만드는 하만테크놀로지(Harman Technology)의 경영이사 그레그 서머스가 새 생산 기계를 들이면서 한 말이다. 필름은 끝난 산업이라던 시대에 공장이 기계를 새로 주문하고 있고, 그 한복판에 흑백필름이 있다. 컬러 필름도 스마트폰 카메라도 넘쳐나는데 굳이 색을 빼겠다는 사람들은 왜 계속 늘어날까. 이 글은 그 인기의 이유를 세 갈래 — 예측 가능한 결과물, 90년 가까이 검증된 필름, 부엌에서도 가능한 직접 현상 — 로 짚는다. 국내에서 실제로 얼마에 사서 얼마에 현상할 수 있는지도 실측 가격으로 정리했다.
흑백필름 공장이 다시 기계를 주문한다
하만테크놀로지는 은행 자금을 끌어와 천만 파운드 단위의 설비 투자를 단행했다. 새 기계가 돌아가면 135 필름 카세트 연간 생산량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직원 200명이 85개국으로 필름을 수출하는 이 회사의 경영이사는 더 매뉴팩처러와의 인터뷰에서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필름에 빠지는 것을 본다”고 말했다. 같은 기사가 인용한 시장조사는 필름카메라 시장이 2023년 2억 2,320만 파운드에서 2030년 3억 1,100만 파운드까지 해마다 5.2%씩 커질 것으로 내다본다. 바다 건너 코닥도 같은 방향이다. CEO 짐 컨티넨자는 페타픽셀이 전한 발언에서 “수요가 있는 한 필름을 계속 만들겠다”며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기술자를 더 뽑고 있다고 밝혔고, 배급사 코닥 알라리스와는 2028년까지 공급 계약을 맺어 뒀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에 쓰인 65mm 흑백필름을 새로 만들어 납품한 곳도 코닥이다. 흑백필름의 부활은 감성적인 구호가 아니라 공장 발주서와 채용 공고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설비를 새로 들였다는 문장에서 한 번 멈췄다. 필름이 다시 팔린다는 기사는 몇 년째 나오는데, 그건 쌓여 있던 재고를 파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설비를 들이는 건 다르다. 앞으로 10년은 이 수요가 안 꺼진다고 회사가 돈을 걸었다는 뜻이니까.
일포드 HP5, 1931년에서 온 흑백필름
수요가 돌아온 첫 번째 이유는 예측 가능성이다. 컬러 필름은 현상소마다, 스캐너마다 색감이 미묘하게 달라지지만 흑백필름은 그 변수가 훨씬 적다. 명암과 계조만 남기 때문에 결과물이 상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실패해도 원인을 되짚기 쉽다. 처음 필름을 잡는 사람에게는 이 단순함이 안심이 된다. 인화까지 직접 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흑백은 문턱이 낮다. 약품이 단순하고, 암실 장비도 컬러보다 덜 까다롭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갈래는 검증의 시간이다. 그 예측 가능성을 한 세기 가까이 증명해 온 이름이 일포드(Ilford)다. 지금 팔리는 HP5 플러스의 족보는 1931년 ‘하이퍼센시티브 팬크로매틱(Hypersensitive Panchromatic)’ 유리 건판까지 올라간다. HP라는 이름 자체가 그 머리글자다. 이 유리 건판이 1935년 감도 160의 HP 롤필름으로 이어졌고, 감도를 끌어올리는 개량을 거듭한 끝에 1989년 지금의 HP5 플러스가 나왔다(캐주얼 포토파일의 HP5 연대기). ISO 400의 이 필름은 전통적인 입방형 은염 입자를 써서 입자가 눈에 보이면서도 선예도를 잃지 않고, 그림자를 뭉개지 않는 계조로 흐린 날 촬영을 버텨낸다. 감도를 1600까지 밀어 올리는 증감 현상도 소화한다. 90년 묵은 이름이 지금도 입문자의 첫 흑백필름으로 팔린다는 사실 자체가 이 필름의 이력서다.
HP가 사람 이름이거나 규격 코드인 줄 알았다. 하이퍼센시티브 팬크로매틱의 머리글자라는 건 이번에 찾아보고 알았다.
코닥 트라이엑스, 1940년부터 이어진 맞수
반대편에는 코닥(Kodak) 트라이엑스(Tri-X)가 있다. 연혁부터 정확히 짚자. 트라이엑스는 1940년 대형 시트필름으로 먼저 데뷔했고, 35mm와 120 롤필름 버전은 1954년에 나란히 출시됐다(코닥 트라이엑스 연혁). 1960년경 감도 표기가 200에서 400으로 바뀌었는데, 필름을 손본 것이 아니라 ASA 감도 표준 자체가 개정되면서 같은 필름이 재표기된 것이다. 트라이엑스는 도드라진 입자와 강한 대비로 어두운 곳에서 강단 있게 버틴다. 표준 현상액으로도 EI 800까지 무리가 없고, 현상액을 묽게 타고 교반을 멈춘 스탠드 현상으로는 3200에서 6400까지 밀어 올린다. 사진기자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반세기 넘게 이 필름을 놓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일포드 HP5와 코닥 트라이엑스의 비교는 필름 커뮤니티에서 몇 년째 끝나지 않는 논쟁거리다.
흑백필름 가격, ‘싸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흑백필름이 컬러보다 싸다는 통념이 있다. 다나와에서 2026년 8월 실제 판매가를 조회해 보면 그 말은 절반만 맞다.
| 필름 (36장) | 종류 | 국내 판매가 |
|---|---|---|
| 럭키 흑백 400 | 흑백 | 8,360원 |
| 켄트미어 PAN 100 | 흑백 | 8,900원 |
| 일포드 HP5 플러스 400 | 흑백 | 17,500원 |
| 코닥 트라이엑스 400 | 흑백 | 약 35,620원~ |
| 코닥 골드 200 | 컬러 | 15,400원 |
| 코닥 울트라맥스 400 | 컬러 | 17,200원 |
| 코닥 포트라 400 | 컬러 | 33,370원 |
표가 보여주는 구도는 셋이다. 켄트미어나 럭키 같은 저가 흑백은 8천 원대로 컬러 최저가보다 싸다. HP5는 골드·울트라맥스 같은 소비자용 컬러와 같은 값이다. 그리고 트라이엑스는 포트라급 몸값인 데다 국내 재고 대부분이 해외구매 물량이라 손에 넣기도 번거롭다. 환율과 재고에 따라 출렁이는 값이니, 구매 시점의 실거래가는 직접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 국내에서 첫 흑백필름을 고른다면 현실적인 선택지는 트라이엑스가 아니라 HP5, 더 아끼려면 켄트미어다. 켄트미어 역시 하만테크놀로지가 2007년 인수해 직접 만드는 일포드의 보급형 형제 브랜드라, 싸다고 계보가 없는 필름이 아니다.
이 표에서 제일 눈에 걸리는 건 트라이엑스와 켄트미어의 네 배 차이다. 여기서부터는 어떤 필름을 고르느냐가 아니라 이름값을 얼마나 낼 것이냐의 문제가 된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한테 그 이름값은 별 소용이 없다고 본다. 싼 걸로 많이 찍어보는 쪽이 남는 게 많다.
20°C면 충분하다, 흑백필름 직접 현상
흑백필름 인기의 마지막 갈래는 부엌에서도 현상이 된다는 점이고, 근거는 온도다. 컬러 현상(C-41)은 현상액을 37.8°C에 맞추되 허용 오차가 ±0.15°C에 불과하다. 코닥이 공식 규격 문서 Z-131에 못 박아 둔 수치다. 반면 흑백 현상의 표준 온도는 20°C, 그냥 실온이다. 일포드 공식 입문 가이드가 요구하는 준비물도 단출하다. 현상액·정지액·정착액 세 가지 약품에 현상 탱크와 릴, 필름을 감을 암백, 온도계와 타이머, 계량 저그와 필름을 널 클립 정도가 전부다. 현상→정지→정착→수세→건조 다섯 단계를 거치면 네거티브가 손에 쥐어진다.
±0.15°C를 보고 컬러 현상을 직접 해보겠다는 생각은 접었다. 부엌에서 맞출 수 있는 정밀도가 아니다. 흑백이 실온이라는 건 좀 편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집에서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선이다.

국내에서도 이 약품들을 구할 수 있다. 암실용품 전문몰 포토트리 실측 가격으로 코닥 D-76 현상액 19,000원, 일포드 일포스탑 정지액 28,000원, 일포드 래피드 픽서 정착액 25,500원 — 약품 3종 기준 6만~7만 원대면 시작할 수 있다(현상 탱크 등 장비는 별도). 현상액을 일포드 일포졸3(26,000원)로 골라도 값은 비슷하다. 다만 품절이 잦아서 약품 구하기가 늘 수월하지는 않다. 흑백 현상과 인화를 가르치는 원데이클래스도 열리고 있으니, 처음에는 현상소에 맡겨 과정을 눈으로 익히고 나중에 직접 해보는 순서가 안전하다. 현상소에 맡길 때의 절차와 요령은 필름현상소 이용법 — C-41 현상 5단계와 맡기기 전 확인할 것에서 단계별로 다뤘다. 찍는 데서 끝나지 않고 만드는 데까지 손이 닿는 매체는, 대중 사진에서 흑백필름이 사실상 유일하다.
흑백 사진의 미감은 결국 뺄셈에서 나온다. 색을 걷어내면 명암과 질감, 순간의 표정만 남는데 이상하게도 사진은 더 진해진다. 디지털 흑백 필터와는 태생이 다르다. 은염 입자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빛 자체에 반응해 제 몸을 바꾼 물질이기 때문이다. 공장이 기계를 새로 발주하고 입문자가 8,900원짜리 켄트미어 한 롤을 카메라에 감는 지금의 풍경은, 유행이라기보다 복원에 가깝다. 셔터를 누르고 20°C의 약품 속에서 상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사진은 찍는 일에서 만드는 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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