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중전화 부스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던 시절이 있었다. 허리춤에 찬 기계에서 숫자 몇 개가 뜨면, 급히 동전을 챙겨 공중전화로 뛰어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스마트폰은커녕 문자메시지도 낯설던 시절, 삐삐와 시티폰은 한국인 대부분이 처음으로 경험한 ‘이동하며 연결된다’는 감각이었다.
가입자 1,500만 — 숫자로 보는 삐삐 열풍
무선호출 서비스, 이른바 삐삐는 1982년 12월 15일 시범 서비스로 시작됐다. 첫 가입자는 235명 — 그나마 신청이 몰릴 것을 우려해 300명으로 제한을 걸고 받은 숫자다(당시 매일경제 지면을 발굴한 기사). 값비싼 업무용 장비로 출발한 이 기계는 1986년 3만 8천, 1988년 10만을 거치며 서서히 퍼지다가 1990년대에 폭발했고, 정점이던 1997년에는 가입자가 1,500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언론이 인용한 통계로 인구 대비 보급률 32%, 가입자 규모로 세계 3위였다(동아일보 1997년 9월 보도를 인용한 아카이브). 국민 세 명 중 한 명꼴로 허리춤에 이 기계를 차고 다녔다는 뜻이다. 다만 삐삐는 수신 전용이었다. 상대가 남긴 숫자만 보고 무슨 뜻인지 해석해야 했고, 답은 공중전화까지 달려가야 확인할 수 있었다.
1,500만이면 그때 인구 셋 중 하나다. 이 숫자를 처음 보고 좀 놀랐다.
8282와 1004 — 숫자 언어의 시대
숫자밖에 보낼 수 없다는 제약은 뜻밖의 문화를 만들었다. 숫자 조합에 뜻을 싣는 삐삐 암호가 전국 공통어처럼 퍼진 것이다. 당시 실제로 쓰였다고 여러 매체가 기록한 표현들만 추려도 목록이 꽤 된다.
| 숫자 | 뜻 |
|---|---|
| 8282 | 빨리빨리 |
| 1004 | 천사 |
| 486 | 사랑해 (한글 획수) |
| 0404 | 영원히 사랑해 |
| 9090 | 고고(gogo) |
| 1010235 | 열렬히 사모 |
‘486’이 사랑해인 이유는 발음이 아니라 획수다 — 사(4획) 랑(8획) 해(6획). 제한된 기술 안에서 마음을 전하려는 궁리가, 발음으로도 모자라 글자의 획까지 세게 만든 것이다. 삐삐 소리가 울리면 주변 사람들이 함께 번호를 들여다보며 뜻을 해석해 주던 풍경도, 이 숫자 언어가 모두의 공용어였기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그 세대에게 그 시절을 물어보면 대부분 비슷한 장면을 떠올린다. 수업 중에 허리춤이 부르르 떨려 화들짝 놀라던 순간, 방금 찍힌 번호가 누구인지 짚어보며 공중전화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초조함. 메시지 하나를 받는 일에 그만한 긴장이 붙어 있었다.
8282를 아직도 읽을 수 있다는 게 스스로 좀 웃긴다. 그때는 이게 언어였고, 지금은 아무 데도 안 쓰는데 머리에서 안 지워진다.
시티폰 — 3년 만에 끝난 다리
삐삐의 ‘수신만 된다’는 반쪽을 메우러 나온 것이 시티폰이다. 발신 전용 휴대전화(CT-2)인 시티폰은 1997년 3월 20일 수도권에서 서비스를 시작해 한 달 만에 10만, 100일 만에 30만 가입자를 모았다. 가입자의 약 90%가 삐삐를 함께 쓰고 있었다는 통계가 이 기계의 정체를 정확히 설명한다 — 수신은 삐삐로, 발신은 시티폰으로. 1990년대 후반 한국의 이동통신은 이 2단 조합으로 완성됐다. 요금이 휴대폰의 3분의 1이라는 게 최대 무기였다.
한계도 명확했다. 기지국 반경이 100~200미터에 불과해 조금만 벗어나면 끊겼고, 기지국 하나가 동시에 감당할 수 있는 통화가 2~6건뿐이라 번화가에서는 연결 자체가 어려웠다. ‘건물 안에만 들어가면 먹통이 되는 전화’라는 불만이 흔했던 이유다. 그리고 결정타는 바깥에서 왔다. 시티폰이 개시된 바로 그해 10월 PCS가 상용화되면서 휴대폰 값과 요금이 급락했다. 수신과 발신이 다 되는 기계가 비슷한 가격대로 내려오자 반쪽짜리 조합이 설 자리는 없었다. 시티폰 가입자는 정점 70만에서 미끄러져 2000년 1월 서비스가 종료됐다. 개시부터 종료까지 3년이 채 안 된다.
삐삐의 몰락은 더 가팔랐다
1997년 10월 상용화된 PCS는 통신 시장의 판을 갈아엎었다. 1998년 말 588만이던 PCS 가입자는 2000년 1,236만까지 치솟았고(컴퓨터월드 집계), 그 거울상으로 1998년 9월 휴대전화 가입자가 삐삐 가입자를 추월했다. 그해 12월 삐삐 가입자는 1,000만 아래로 떨어졌고, 2000년에는 45만 명까지 줄었다. 정점에서 바닥까지 3년이 걸리지 않았다. 1,500만 명이 쓰던 물건이 이렇게 빨리 사라진 사례는 통신의 역사를 통틀어도 드물다. 마지막 전국 사업자가 2009년 문을 닫으면서 전국 단위 삐삐 서비스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90년대 삐삐에서 2020년대 AI 스마트폰까지, 한국 통신기기의 세대교체 속도는 유난히 가팔랐고, 그 첫 번째 희생자가 삐삐였던 셈이다.
시티폰은 지금 보면 실패한 물건인데, 나는 이게 실패라기보다 타이밍 문제였다고 본다. 3년만 늦게 나왔어도 아예 안 나왔을 것이고, 3년 일찍 나왔으면 다르게 갔을지도 모른다.
아직 삐삐가 울리는 곳
그런데 이 기계, 완전히 죽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2010년 기준으로도 약 2만 명이 삐삐를 쓰고 있었는데, 주 사용층은 병원의 의사·간호사와 대형 공장의 근로자 — 휴대폰 전파가 문제거나 즉각 호출이 생명인 직군이다. 영국은 더하다. BBC 보도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가 여전히 삐삐 13만 대를 쓰고 있었고, 이는 당시 전 세계에 남은 삐삐의 10분의 1이었다. 반드시 닿아야 하는 연락에는, 반쪽짜리라던 그 단순함이 오히려 강점이 된다. 이웃 일본의 ‘포켓벨’은 1996년 계약 1,000만 건으로 정점을 찍고 2019년 9월 30일 마지막 전파를 끊었는데, 종료 시점의 이용자는 1,500명이 채 안 됐는데도 언론들이 부고 기사를 쓰듯 그 종료를 다뤘다. 반세기를 산 통신수단의 퇴장이었기 때문이다. 국내 중고 장터에도 삼성 애니삐나 모토로라 삐삐 실물이 레트로 소품으로 이따금 올라온다. 시세라 부를 만한 시장은 없지만, 버려지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이 기계가 지나온 자리를 말해 준다.
돌이켜보면 삐삐와 시티폰은 완전한 기술이 아니었다. 하지만 숫자 몇 개에 마음을 눌러 담고, 그 뜻을 해석하려 애쓰던 그 시절의 소통은 느린 만큼 간절했다. 무전기 버튼을 누르며 “오버”를 외치던 감각과 나란히, 삐삐는 ‘연결’이 아직 노력의 산물이던 마지막 세대의 물건으로 남았다. 486을 해독하려면 상대의 마음을 한 획씩 세어야 했다. 연결이 꼭 그만큼의 수고이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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