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의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 산업
1943년, 미국의 발명가 에드윈 랜드는 세 살배기 딸과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었다. 딸이 “왜 사진을 찍고 나서 바로 볼 수 없냐”고 물었고, 랜드는 그 질문에 진지하게 매달려 산책 한 시간 만에 원리를 구상해냈다고 전해진다. 5년 뒤인 1948년, 그는 촬영 즉시 현상까지 끝내는 카메라를 세상에 내놓았다. 폴라로이드라는 이름은 이렇게 즉석사진의 대명사가 됐다. 그런데 정작 지금 즉석카메라 매대를 채우고 있는 건 폴라로이드가 아니라 후지필름의 인스탁스다. 원조가 밀려나고 후발주자가 시장을 가져간, 흔치 않은 역전극이 어떻게 벌어졌을까. 두 브랜드의 발자취를 나란히 놓고 보면, 기술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몇 가지 결정적인 순간들이 보인다. 그리고 같은 두 회사가 몇 년 뒤 일회용카메라에서 한 번 더 맞붙는다. 이 글은 그 두 판을 나란히 놓는다.
이미 필름을 만들던 회사의 강점
후지필름은 원래 즉석카메라 회사가 아니라 필름을 만들던 회사였다. 1981년에는 ‘포토라마’라는 이름으로 이미 즉석카메라 사업에 발을 들였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98년 인스탁스 브랜드를 정식으로 선보였다. 즉석 필름 자체를 자체 생산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춘 회사가 즉석카메라 시장에 뛰어든 셈이라, 필름 원가와 공급 안정성에서부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폴라로이드가 즉석카메라 하나에 사업의 명운을 걸었던 것과 달리, 후지필름은 일반 필름과 인화 사업이라는 든든한 본업을 뒤에 두고 즉석카메라 시장에 뛰어들 수 있었다는 차이도 있다.
세 살짜리의 질문 하나가 산업이 됐다는 이야기는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나는 반대로 읽힌다. 그 질문을 흘려듣지 않은 쪽이 오히려 이상한 거다. 대부분의 어른은 그냥 원래 그런 거라고 답하고 넘어간다.
폴라로이드와 코닥의 특허 전쟁이 남긴 빈자리
사실 폴라로이드도 처음부터 이 시장을 독점하지는 못했다. 1963년부터 폴라로이드에 필름을 위탁 생산하던 코닥은 1976년 자체 즉석카메라 EK4를 내놓으며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폴라로이드는 곧바로 특허 침해로 코닥을 제소했고, 무려 9년을 끈 소송 끝에 1985년 코닥이 12개 항목 중 7개에서 패소하며 즉석사진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런데 정작 이 소송이 끝나갈 무렵, 폴라로이드의 특허 보호막도 함께 만료를 앞두고 있었다. 후지필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특허가 완전히 만료된 1998년, 미국 시장에 ‘인스탁스 미니 10’을 내놓았다. 초당 감도 ISO 800으로 폴라로이드의 ISO 640보다 우수한 감도와 개선된 컬러 화학 기술까지 앞세운 채였다. 이후 인스탁스의 연간 판매량은 2002년 100만 대 수준에서, 디지털카메라 확산으로 2004년 한때 10만 대까지 떨어졌다가 2015년 500만 대, 2019년에는 1,000만 대까지 치솟았다. 후지필름은 2025년 기준 전 세계 100개국 이상에서 누적 1억 대의 카메라와 프린터를 판매했다고 밝히고 있다. 코닥을 법정에서 이기고 지켜낸 특허가, 정작 그 특허가 사라지자마자 새로운 경쟁자에게 자리를 내준 셈이다.

코닥이 물러난 자리를 후지가 가져갔다는 게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본다. 시장에서 이기는 게 꼭 더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남이 못 하게 된 자리에 서 있어서인 경우가 있다.
한국 시장의 균형이 깨진 순간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미국 폴라로이드 제품이 즉석카메라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 구도가 흔들린 건 1999년, 한국후지필름이 인스탁스를 정식 출시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두 브랜드가 나란히 경쟁하는 양강 구도가 만들어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저울추는 인스탁스 쪽으로 기울었다. 처음 출시된 인스탁스 미니 규격은 46×62mm의 작은 사진 크기였는데, 이 아담한 크기가 오히려 부담 없이 여러 장을 찍고 나눠 갖기 좋다는 인상을 남기며 초기 진입 장벽을 낮췄다.
1999년이면 학교에서 소풍 가던 시절이다. 그때 누가 꺼낸 게 폴라로이드였는지 인스탁스였는지는 기억이 흐릿한데, 필름값이 아까워서 몇 장 못 찍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 장에 얼마인지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셔터를 누르던 감각은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디지털 전환기에 흔들린 원조
폴라로이드에게 결정적이었던 건 디지털카메라로 넘어가는 시기의 대응이었다. 회사는 2001년 파산보호를 신청했고, 2008년에는 자체 즉석필름 생산도 결국 완전히 멈췄다. 오랫동안 ‘즉석사진 = 폴라로이드’라는 인식을 만들어온 회사가 정작 그 시기에 필름 자체를 공급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필름이 완전히 끊기는 걸 막은 건 회사가 아니라 팬들이었다. 네덜란드의 마지막 폴라로이드 필름 공장이 문을 닫으려 하자, 즉석사진을 아끼던 사람들이 공장 설비를 사들여 필름 생산법을 처음부터 다시 복원해냈다. 이 프로젝트가 훗날 지금의 폴라로이드 브랜드로 이어졌으니, 브랜드 이름은 남았지만 그 명맥을 이어붙인 건 원래 회사가 아니라 애호가들이었던 셈이다.
이름이 대명사가 되는 것과 회사가 살아남는 것은 다른 문제다. 지금도 즉석사진을 두고 “폴라로이드 찍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그 이름으로 필름을 만들던 회사는 한 번 사라졌다 돌아왔다.
빈 자리를 채운 대중화 전략
같은 시기 인스탁스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미니, 스퀘어, 와이드처럼 크기별 라인업을 늘려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게 했고, 필름 가격을 상대적으로 낮게 유지하면서 학생과 젊은 층까지 구매층을 넓혔다. 사진 한 장을 찍는 데 드는 부담이 낮아지자, 여행이나 모임 같은 일상적인 순간에도 즉석카메라를 꺼내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카메라 본체 디자인도 파스텔 색상부터 캐릭터 협업 모델까지 다양하게 내놓으면서, 사진 장비라기보다 하나의 소품이나 선물처럼 소비되게 만든 것도 주효했다.
같은 승부가 한 번 더, 이번엔 일회용카메라에서
후지필름과 코닥은 즉석사진 말고 한 판을 더 벌였다. 필름을 미리 넣어 파는 일회용카메라 시장이다. 시작을 따지면 1949년 포토팩이라는 회사가 촬영 후 통째로 우편 발송하는 판지 카메라를 내놓은 적이 있지만 시장에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지금 우리가 아는 형태를 만든 건 1986년 후지필름의 ‘우쓰룬데스(写ルンです·찍는 거예요)’다. 해외에는 퀵스냅이라는 이름으로 나갔고 2026년에 출시 40주년을 맞았다. 코닥은 한발 늦었다. 1987년 110mm 필름을 쓰는 플링(Fling)으로 대응했다가 1988년 35mm로 갈아탔고, 1989년 이름을 펀세이버(Fun Saver)로 바꾸면서 지금의 라인업이 자리를 잡았다.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는 심도 깊은 렌즈, 값싼 플라스틱 바디, 한 통을 다 쓰면 카메라째 반납하는 구조 — 이 세 가지가 일회용카메라라는 발상의 원형이다.
| 브랜드 | 최초 제품명 | 출시연도 |
|---|---|---|
| 후지필름 | 우쓰룬데스 (해외명 퀵스냅) | 1986년 |
| 코닥 | 플링 → 이후 펀세이버로 개명 | 1980년대 후반 |
두 판을 나란히 놓으면 순서가 정반대다. 즉석사진에서 후지필름은 남이 만들어 40년을 지킨 시장에 특허가 풀린 뒤에야 들어가서 이겼고, 일회용카메라에서는 자기가 먼저 열어놓고 뒤따라온 코닥을 막아냈다. 늦게 들어가서 이긴 판과 먼저 들어가서 이긴 판이 한 회사 안에 같이 있다.
원조가 어느 쪽이냐는 논쟁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이 물건이 한 번 사라졌다가 돌아왔다는 쪽이다.
27컷이라는 제한이 만든 유행
그 일회용카메라가 지금 다시 팔린다. 편의점이나 필름 전문점에서 만원 안팎에 사서 스물일곱 장을 채우고 나면 카메라를 통째로 현상소에 맡기는, 지금 기준으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다. 필터도 미리보기도 없고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자리에서 지울 수 없다. 사기 전에 알아둘 게 하나 있다면 플래시다. 충전 버튼을 눌러 충전음이 멈춘 뒤에 셔터를 눌러야 실제로 발광하는데, 이걸 모르고 셔터만 눌러 실내 사진을 어둡게 날리는 경우가 많다. 다 찍은 필름은 카메라째 맡기면 되고, 현상과 스캔을 함께 맡기면 스마트폰으로 바로 옮겨볼 수 있다. 맡기기 전에 확인할 것들은 필름현상소 이용법 — C-41 현상 5단계와 맡기기 전 확인할 것에 따로 정리해뒀다.
27컷이라는 제한이 지금 보면 오히려 장점이다. 무한히 찍을 수 있으면 아무것도 고르지 않게 된다.
필름 사진에 발을 들이는 길은 대개 두 갈래다. 편의점에서 일회용카메라를 집어 드는 길과, 중고 시장에서 클래식 SLR을 찾아 나서는 길. 두 길은 경쟁이 아니라 순서에 가깝다. 렌즈 상태와 셔터 속도, 라이트씰까지 확인해야 하는 중고 필름카메라보다 실패 확률이 훨씬 낮으니, 필름이라는 매체가 어떤 느낌인지부터 몸으로 익히기에는 이쪽이 낫다.
지금 매대에 남은 이름
지금 카메라 매장이나 소품샵에 가면 인스탁스 라인업이 압도적으로 넓게 진열돼 있는 걸 볼 수 있다. 원조가 시장을 잃고 후발주자가 대명사 자리를 가져간 셈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즉석사진을 이야기할 때 ‘폴라로이드’라는 말을 관용어처럼 쓴다. 마치 반창고를 다 ‘대일밴드’라고 부르는 것처럼, 브랜드 이름 자체가 하나의 보통명사가 돼버린 것이다. 다만 그 관용어를 실제로 채우고 있는 매출과 매대 점유율은 결국 인스탁스 쪽에 더 많이 돌아간다는 게 이 역전극의 핵심이다.
즉석카메라 시장 연표
| 연도 | 사건 |
|---|---|
| 1948 | 폴라로이드, 최초 즉석카메라 출시 |
| 1976 | 코닥, 즉석카메라 시장 진출 |
| 1986 | 폴라로이드-코닥 특허소송 폴라로이드 승소, 코닥 즉석카메라 사업 철수 |
| 1998 | 후지필름, 인스탁스 브랜드 정식 출시 |
| 2001 | 폴라로이드 1차 파산 신청 이후 여러 차례 경영난 |
| 2010년대~ | 인스탁스, 전 세계 즉석카메라 시장 점유율 1위 |
참고: Wikipedia 「Instax」, Digital Camera World 「The curious tale of how Fujifilm Instax cameras survived a brutal patent war」, The Japan Times 「Fujifilm’s QuickSnap celebrates 40 years amid renewed interest in analog」, Digital Camera World 「Kodak’s Fling failed while Fujifilm’s QuickSnap conquered the world」
이름은 원조가 만들었지만, 자리는 결국 끝까지 남은 쪽이 가져간다.
이 시대 감성을 더 느끼고 싶다면 우리가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가는 이유 이야기도 함께 읽어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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