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 보드게임 판데믹의 실제 보드판, 질병 확산 네트워크와 큐브가 보인다

협력 보드게임 판데믹, 500만 장 팔린 이기고 지지 않는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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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판데믹(Pandemic)을 처음 테이블에 올리면 꼭 나오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누가 이기는 거예요?” 답은 간단하다. 전부 다 이기거나, 전부 다 진다. 협력 보드게임이라는 장르의 문법이다. 나는 정치 카드게임 폴리티카(PolitiCA)의 규칙을 설계하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을 때, 이 게임을 다시 꺼내 들었다.

스캔들 카드가 마음에 걸렸던 날

초기 폴리티카 기획안에는 ‘상대 정치인 카드를 스캔들로 낙마시킨다’는 공격형 카드가 실제로 존재했다. 정치라는 소재를 카드게임으로 옮긴다고 하면 대개 “상대를 제압하라”는 대결 구도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고,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결은 정치라는 소재가 기본값으로 제공하는 드라마였으니까. 테스트 플레이에서 이 방식은 분명 재미있었다. 그런데 판이 끝나고 나면 매번 뭔가가 남았다. 실존 인물을 공격의 대상으로만 소비하는 구도가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정치가 정말 누군가를 쓰러뜨려야만 완성되는 게임일까? 그 답을 찾으려고 나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지 않고도 성립해 온 게임들의 계보를 뒤지기 시작했고, 그 계보의 한가운데에 판데믹이 있었다.

협력 보드게임 판데믹은 부부 게임의 파국에서 태어났다

게임 디자이너 매트 리콕(Matt Leacock)이 판데믹을 구상한 건 2004년이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이어진 사스(SARS) 사태가 소재를 줬다. 그는 스포크스맨리뷰 인터뷰에서 “2004년 사스가 유행했다. 나는 조악한 모델과 게임의 훅을 떠올렸다”고 출발점을 밝혔다. 그런데 소재보다 중요한 건 동기였다. 리콕은 어느 날 밤 아내와 협상 게임을 했고, 자신이 이겼다. 그리고 그 승리를 뉴욕타임스가 배포해 여러 지면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게임에서는 이겼지만, 그 감정이 현실로 넘어오는 끔찍한 경험이 됐다.” 승패를 가르는 구조가 게임 밖의 관계까지 흔든다는 걸 확인한 그는, 이기든 지든 아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기로 했다.

부부가 처음으로 함께 즐긴 협력 게임은 라이너 크니치아의 ‘반지의 제왕'(2000)이었고, 그 경험이 방향을 굳혔다. 사스에서 얻은 훅은 3년의 개발과 플레이테스트를 거쳐 2008년 Z-Man Games에서 판데믹으로 발매됐다. 애플과 야후를 거친 인터랙션 디자이너였던 리콕은 이 게임의 성공 이후 전업 게임 디자이너가 됐다. 판데믹은 플레이어 전원이 의사, 과학자, 작전 전문가 같은 일곱 가지 역할을 나눠 맡고, 전 세계로 퍼지는 네 가지 질병의 치료제를 아웃브레이크가 누적되기 전에 함께 찾아내는 완전 협력 게임이다. 져도 원망할 상대가 테이블에 없다는 것, 그게 이 설계의 심장이다.

협력 보드게임이 세계 1위에 오르던 날

판데믹은 협력 보드게임이라는 장르를 상업적으로 증명했다. 2020년 3월 시점에 200만 부를 넘겼던 누적 판매량은 2021년 12월 퍼블리셔 공식 발표 기준 500만 부를 돌파했다. 코로나19가 실제로 세계를 덮치던 2020년 봄, 워싱턴 D.C.의 한 게임 매장에서는 판데믹 판매가 4배로 뛰었고, 아마존 보드게임 차트에서는 모노폴리와 클루 바로 다음 자리까지 역주행했다. 2020년 3월 200만이던 누적 판매량이 21개월 뒤 500만이 됐으니, 현실의 팬데믹을 관통하는 동안 300만 부가 더 팔린 셈이다. 사람들은 현실의 위기 앞에서, 그 위기를 협력으로 이겨내는 연습을 게임판 위에서 찾았다.

랭킹의 역사도 바뀌었다. 2015년 나온 ‘판데믹 레거시 시즌1’은 2016년 1월 1일 보드게임긱(BGG) 종합 1위에 올랐다. 그때 1위 자리를 내준 게임이 5년 넘게 왕좌를 지키던 트와일라잇 스트러글 — 냉전을 두 플레이어의 대결로 옮긴, 내가 폴리티카 시리즈에서 따로 다룬 바로 그 게임이다. 그리고 다음 왕좌 역시 협력 게임인 글룸헤이븐(2017)에게 돌아갔다.

시기BGG 종합 1위방식
2010~2015트와일라잇 스트러글2인 대결
2016~2017판데믹 레거시 시즌1협력
2017~2023글룸헤이븐협력
보드게임긱(BGG) 종합 1위 계보 — 대결에서 협력으로

흐름은 1위 자리 바깥에서도 이어졌다. 협력 게임 스피릿 아일랜드(2017)는 BGG 9위까지 올랐고, 협력 트릭테이킹 카드게임 더 크루(2019)는 2020년 독일 켄너슈필 데스 야레스를 받았다. 지난 15년의 굵직한 신작 목록에서 협력 게임은 더 이상 곁가지가 아니다. 대결 게임의 정점이 협력 게임에게 자리를 넘기고, 그 자리를 다시 협력 게임이 물려받은 흐름이 랭킹에 그대로 찍혀 있다. 계보를 뒤지던 나에게 이 표는 하나의 답안지처럼 보였다.

보드게임긱 종합 1위 계보 — 트와일라잇 스트러글(2인 대결)에서 판데믹 레거시 시즌1, 글룸헤이븐(협력)으로
2016년 판데믹 레거시 시즌1이 왕좌를 넘겨받은 뒤, BGG 종합 1위는 협력 게임의 자리가 됐다

제로섬을 버리자 폴리티카가 달라졌다

이 과정에서 내가 다시 정리하게 된 개념이 ‘제로섬’이다. 게임이론에서 제로섬은 한쪽의 이득이 정확히 다른 쪽의 손실이 되어 합이 0이 되는 구조를 가리킨다. 반대편의 비제로섬은 교역과 같다. 바나나와 사과를 맞바꾼 양쪽이 모두 이득을 보는, 승자의 몫이 패자의 주머니에서 나오지 않는 구조다. 스캔들 카드가 지배하던 초기 폴리티카가 딱 그랬다. 내 이득은 상대 정치인의 낙마에서만 나왔다. 판데믹은 이 구조 자체를 부순 게임이다. 플레이어가 맞서는 상대는 다른 플레이어가 아니라 게임 시스템이다. 리콕의 표현을 빌리면 “협력 게임은 인공의 적에 함께 맞서는 일이고, 그건 연습해 둘 가치가 있는 기술”이다. 흥미로운 건 판데믹과 같은 2008년에 나온 덱빌딩 게임 도미니언이다. 각자 자기 덱을 사고 다듬어 남보다 먼저 승점을 쌓는 경쟁 문법의 정점에 선 이 게임은 2017년까지 250만 부가 팔렸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게임이 정반대의 문법으로 각자 성공했다는 건, 문법 자체에 우열이 없다는 뜻이다. 문제는 어떤 소재에 어떤 문법을 붙이느냐다. 그리고 내 소재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정치였다.

그 고민 앞에서 리콕의 디테일 하나가 유독 오래 남았다. 그는 판데믹의 네 가지 질병에 끝내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실제 질병으로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였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게임의 소재로 올릴 때 어디까지 조심해야 하는가 — 스캔들 카드를 붙잡고 씨름하던 내게, 이 이름 없는 질병들은 하나의 기준선이 됐다.

폴리티카는 판데믹 같은 완전 협력 게임이 아니다. 각자의 목표는 여전히 개별적이고, 51점에 먼저 도달하는 사람이 이긴다. 하지만 테스트 이후 나는 공격 카드의 비중을 크게 줄이고, 각자의 정치적 서사 — 지역구를 다지고, 법안을 통과시키고, 여론을 얻는 과정 — 를 점수로 환산해 쌓아가는 성과축적형 구조로 방향을 틀었다. 내 51점은 상대에게서 빼앗아 온 점수가 아니다. 상대의 패를 부수지 않아도, 누군가를 게임판에서 지우지 않아도 승부는 성립한다. 이 결정 하나가 게임 전체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판데믹이 던진 질문 — 꼭 누군가를 이겨야만 게임이 되는가 — 과 같은 자리에서 출발한 셈이다. 폴리티카를 처음 구상하게 된 계기는 시리즈 1편에 담아뒀다.

협력 보드게임이 15년 넘게 몸집을 키워온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들은 이기는 것 못지않게 함께 해냈다는 감각을 원하고, 함께 실패하고 함께 복기한 판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정치라는 소재는 원래 대결의 언어로, 승자와 패자의 언어로 가득하다. 그러나 리콕이 부부 게임의 파국에서 협력의 문법을 길어 올렸듯, 나는 스캔들 카드를 내려놓은 자리에서 폴리티카의 문법을 얻었다. 언어를 다르게 쓰면 게임이 달라지고, 게임이 달라지면 그 판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도 달라진다.

판 위의 감정은 판이 끝나도 사라지지 않기에, 판 위에 올릴 것을 골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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